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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헌법심사회 덕에 미노베 교수 악몽 다시 꾸는 일본

천황=국가원수 규정 움직임…군대 보유 금지 문제보다 '더 위험'

임혜현 기자 기자  2012.05.25 17:2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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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일본 정치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일본 국회가 개헌 필요성을 검토한다는 명분으로 현행 헌법의 내용을 검증하기 시작했고, 각 당은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고 일본 언론이 25일(우리와 시차 없음) 보도했는데, 검증 첫 회의 주제부터 민감한 대목을 곧바로 다뤘기 때문이다.

중의원(하원) 헌법심사회는 24일 헌법 내용을 검증하는 첫 회의를 열었다. 첫날 정치인들은 각당의 입장을 대표해 헌법 제1장의 천황제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민주당 의견 못 낸 가운데, 자민당 '국가원수' 명시 주장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제1야당인 자민당은 현행 헌법상 국가와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돼 있는 천황을 '국가를 대표하는 원수'라고 명기하자고 주장했다는 것.

하지만 개헌에 반대하는 사민당과 공산당은 천황을 국가원수라고 명기하자는 주장에도 반대했다. 특히 공산당은 "현행 헌법은 천황의 이름 아래 (국민을) 침략 전쟁으로 몰아넣었다는 반성을 기초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일개인이 세습에 의해 국민 통합의 상징이 되는 구조는 민주주의, 인간의 평등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점까지도 지적했다.

개헌을 두고 내부 의견이 갈린 여당 민주당은 이날 의견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자민당이 일본을 오래 통치해 온 유력 정당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우려를 낳고 있다. 전후 상당한 기간을 여당으로 집권해 온 자민당은 현재도 제1야당으로 위세가 막강하다. 이를 현재 민주당이 겪는 내부적 사정, 즉 계파간 의견 조율의 능력 발휘 문제 등에 비춰 보면 일본 정치권이 자민당의 의견에 상당 부분 좌우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할 수 있다.

더욱이 자민당이 보수적인 우파 정당으로서 스탠스를 갖고 있다는 점, 집권 당시 미일간 동맹을 기반으로 미일 안보협력체제에서 역할을 하는 반대급부로 아시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을 잘 체득하고 있다는 점 등도 감안해야 한다. 과거 냉전시대만 해도 '전범국가'라는 비판으로 강한 드라이브를 걸지는 못했지만, 자민당이 이제는 헌법 개혁 작업이라는 계기를 통해 속내를 드러내는 목소리를 높일 계제도 마련됐다는 점도 문제다.
   
일본 정치권이 헌법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점검, 개혁을 논의하는 가운데 천황의 지위 규정 수정을 놓고 정당간 의견 대립이 일고 있다. 사진은 천황의 국가원수 지위 인정 여부를 놓고 벌어진 해당 논쟁을 보도한 산케이신문(온라인판) 장면.

국가원수, 필연적으로 군최고사령관 아니냐 우려

한편 중의원 헌법심사회는 이달 31일에는 '전쟁 포기, 군대 보유 금지'를 규정한 헌법 9조를 심의하는 등 매주 한 차례씩 헌법 내용을 검토할 예정이다. 그런데 이번에 첫 단추를 천황의 지위로 시작한 만큼, 군 문제 즉 '보통국가(군대를 갖춘 국가를 말하는 일본의 정치용어)로의 지향'이라는 점에서 군 보유와 전쟁 포기 문제를 개별적으로 검토하기 어려워졌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즉 앞으로 개편될 천황제 규정 하에서 군 문제 역시 새로운 타당성과 논리성면에서 도마에 올려놓자는 쪽으로 논의가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위권만 강조하는 비정상적인 조직(자위대)가 아니라 보통국가의 군을 갖자는 논리는 액면상으로는 소박할 수 있으나(이 자체에도 반론 있을 수 있음), 이는 천황제를 '현재의 평화헌법'에서처럼 규정한다는 전제 하에서 가능한 대목이다.

즉 천황을 상징적 존재로 규정하지 않고 헌법에서 보장하는 국가원수로서의 기관으로 격상하는 등 조치가 있는 상황에서 전쟁 포기를 부정하고 군을 갖춘다는 것은 사민당이나 공산당이 우려하는 침략자 시대(멀게는 대만과 우리를 식민화하고 이후 중국과 만주, 태평양에서 전쟁을 수행하던 시기)로 돌아가는 궤도로 작용할 수 있다.

즉 과거 일본은 '개국'과 '유신'을 통해 옛 독일(프러시아)식 전제군주정을 받아들여 헌법과 법률의 체계를 깔고 있었는데, 이런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 쇼와 시대 등을 거치면서 이 전제적 헌법은 사실상 천황에 대해 제어를 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천황의 힘을 등에 업은 전쟁광들에 의한 침략 전쟁마저 가능하게 했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정부의 한 부처도 아니고 현재와 같은 상징적 존재가 아니라 명실상부 국가원수로 규정되게 되면 천황은 다시금 이런 침략 전쟁의 시대와 같은 군의 최고봉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부분이다.

이는 현행 우리 헌법 체계가 대통령을 행정수반인 동시에 국가원수로도 해석하는 점(군을 통수함)이나 미국의 경우 대통령이 최고사령관으로 권능을 부여받으며 이를 자주 강조하는 예 등에서 볼 때, 침략의 과거를 제대로 사과한 바 없는 일본이 시도하기에는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황권 제한하는 헌법 해석론도 압살 역사…'현재 일본도 나날이 보수화' 

물론 일본에서도 이런 헌법에 제약을 가하려는 해석론이 없지 않았다.

멀게는 가토 히로유키 교수(도쿄대 총장을 지냄)가 '국체신론'을 통해 국민이 군주의 종이라는 당시의 상식을 비판했다. 하지만 보수론자들의 공격에 시달려 결국 1871년 11월 신문광고를 내서 1865년 발행한 자신의 저서 '국체신론'을 절판했다는 사실을 소개, 굴복했다.

역시 같은 도쿄대 출신인 미노베 다쓰키치 교수도 '천황기관설'을 주장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1935년(쇼와 10년)에 미노베 교수가 뒤늦게 이 학설로 인해 귀족원(당시 제국의회의 상원격)에서 동료 의원에게 비판을 받는 등 정치적으로 만신창이가 됐다는 점이다. 미노베 교수는 동료 의원의 비난에 대해 신상 발언을 통해, "메이지 39년(1906년) 나온 내 저서인 '일본국법학' 등에서도 '군주주권주의'가 일본 헌법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해 왔다"고까지 해명했다. 즉 자신은 천황이 주권을 갖는다는 점에 반대하는 게 아니며 다만 이를 규정들에 의해 제약하자는 것이라는 제한적 의견임을 강조, 항변한 것이다.

하지만 미노베 교수의 극히 제한적인 천황에 대한 제어 시도(천황기관설)마저도 군국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일본으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웠고, 이미 위에서 봤듯 오래 전부터 주장돼 온 학설임에도 새삼 문제삼아 정계에서 물러나는 상황까지 압박했던 전례가 있다.

이런 상황의 폭주를 물론 현재의 민주주의적 바람을 쐰 일본인들이 받아들이겠느냐는 비판도 가능하다.

하지만 현재 일부 지방에서는 학교의 각종 행사에서 기미가요를 부르는 문제, 국기에 대한 경례 건 등으로 마찰을 빚는 사례와 불응한 교원 등에 대해 탄압하는 조치가 늘고 있다. 더욱이 보통국가화를 외치는 극우적 국수주의자들의 목소리도 여전히 높다. 국제적으로도 북한이 미사일 개발 등으로 문제를 일으키면서 일본이 무장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 용이한 상황이 되고 있으며, 중국의 성장을 제약해야 할 미국의 파트너로 일본의 중요성 역시 중요하다.

결국 국가원수라는 상당히 모호한 위상, 더욱이 헌법을 손보는 과정에서 더 명확해지고 강해질 천황의 위상에 보통국가라는 명분의 군사력 강화, 그리고 일본의 높은 국제적 위상 등이 겹쳐질 경우 이는 주변국들에게 상당한 위협이 될 여지가 높다. 아울러, 헌법심사회가 첫 논의부터 직접적으로 이를 건드리는 것을 업무의 본격 드라이브를 건 점은 단순히 '헌법의 제1장에 있기 때문' 이상의 심각한 나비 효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어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