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Z EZViwe

[교육칼럼]정반합

프라임경제 기자  2007.01.15 11:34:55

기사프린트

[프라임경제]아이들이 좋아하는 노래 중에 정반합이라는 노래가 있다. 아마도 이 노래를 모르는 청소년은 드물겠지만,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부르는 아이 또한 드물 것이다.

*[All] 나 이제 찾는 건, 합(合)을 위한
노력일 뿐 나와 같은 손을, 한 외침을
꿈이 실현 되는 걸 갈망하는 자여..
그대 곁에 정의라는 모습의 용기를

[유노] 네가 속한 사회는 모두
정,반,합(正.反.合)의 흐름 속에서

[믹키] 끝도 없이 새로워져,
없던 길도 만들어가
[영웅, 최강] 나의 반(反)의 무게로

흐름들을 막아서는 안 되지
[최강] Ah--

[All] O-----

우리는 누구나 ‘반’의 시기에 처해 있으며 ‘정’이나 ‘합’보다 ‘반’을 더 많이 느끼고 힘들어한다. ‘합’의 순간은 잠시이고 또다시 ‘반’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급속한 경제성장이라는 ‘합’을 이루었지만 그것은 곧 다시 ‘정’이 되어 ‘독재’라는 ‘반’을 형성했다. 그 ‘반’을 인식하고 민주 자유의 물결이라는 ‘합’을 이루어냈고, 그 합의 물결 속에서 다시 ‘정’이 되어 기술은 발전하고 있지만 인간소외가 심하다는 ‘반’에 처해 있다. 그것을 ‘합’에 이르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커다란 정반합의 예이다. 사회적인 정반합 외에도 개인적인 정반합 또한 우리 스스로에게 이루어지고 있다.
쉬운 예를 한번 들어보겠다. 필자가 아이들을 가르치며 들어주는 예이다.

‘정’ : 반에서 3등
‘반’ : 10등으로 떨어졌을 때
‘합’ : 그 아픔에 굴하지 않고 노력하여 2등으로 올라섰을 때
‘정’ : 2등은 다시 ‘정’이 되고 언제 ‘반’이 올지 모르므로 스스로 정반합을 해야 한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것은 굴러온 돌의 약삭빠름이 아니라, 박힌 돌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정반합을 했다면 굴러온 돌 쯤 튕겨냈을 것이다.

외압에 의한 ‘반’, 즉, 성적이 떨어지거나, 공부 안한다고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혼나는 것보다 스스로 정반합을 통해 발전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반’을 당한 것도 역시 스스로 정반합을 하여 국력을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당한 것이다. 잘못은 둘 다에게 있는 것이지, 일제만 욕할 것이 아니다. 만약 그 때 싸우지 않고 열심히 노력했다면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 역시 남들과 싸우는 데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반합을 하고 스스로 발전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경쟁은 좋은 것이다. 옆 사람과 경쟁을 통해 나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고, 그를 통해 어느 정도 더 노력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으니, 3등에서 10등 떨어지고 나서가 아니라, 3등 했다는 그 사실에 순수하게 기뻐하고 하지만 내 위에 2등과 1등이 있으니 그것을 극복해보고 싶다는 순수한 열정, 질투나 시샘이 아닌 ‘더 겨뤄보고 싶다’는 페어플레이 정신.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반’을 깨닫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어차피 우리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발전해야 하는데 그것을 배우는 것이 바로 학교이다.

아주 쉬운 예이나, 우리 스스로의 삶에서 ‘반’을 극복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반’을 경험하며 그 ‘반’을 극복하며 스스로의 발전을 이루어낸다. 기쁨에 차서 발전을 이루어 내거나 억지로 발전을 이루어 내거나, 어쨌거나 ‘합’을 이루는 그 순간은 기쁘다.

문제는 ‘반’에 처했을 때의 태도이다. ‘우리는 누구나 실패를 두려워한다’ 히딩크가 말했다. 한국팀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태도였다고. 그것을 극복하고 방법을 바꾸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다고 말한다. 호주의 선수들은 자신감이 넘쳐 오만방자해보이기도 했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진 않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풍토는 A라는 사람이 어떤 프로젝트를 맡았다고 하면 그것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지 못할 경우 책임추궁과 조롱이 뒤따른다. 호언장담한 사람에게는 더욱 더 큰 비난이 뒤따른다. 그러게 나설 때부터 알아봤다는 둥, 지가 뭘 안다고 까불더라는 둥. 그 일을 진행하는 사람을 팔짱 끼고 보는 것이 대부분이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자신이 실패했을 경우 일단 ‘힘들었겠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으니 됐어.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을까. 그렇게 사람들이 말해주었을 때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그 실패를 발판삼아 실패한 원인을 분석하고 다음에는 성공시키기 위해 더욱 노력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재 풍토는 그렇지 않고 비난이 난무할 뿐이다. 사람들의 그 비난으로 말미암아 프로젝트를 맡았던 사람은 자기변명에 급급하고, 다시는 뭔가를 하겠다고 나서지 않게 된다.

  이것은 아이들에게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실패를 너무나 두려워한다. 에디슨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다.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자신이 생각한 것을 그대로 실천으로 옮겼고, 그 실험이 실패했더라도 그 실패로 인해 다시 시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왜 실패했는가를 분석한 다음 그것을 보완하여 다음 실험을 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나는 오뚜기 정신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이런 정신이 길러지기엔 너무나 각박한 세상에 살고 있다. 등수가 떨어지면 일단 부모님에게 혼나고, 선생님에게 혼나고, 학원 선생님에게까지 혼난다. 성적이 떨어지는 게 무서우니, 성적과 관련된 공부만 하게 되고, 멀리 보게 되는 독서는 뒷전으로 하게 마련이다. 성적이 높을수록 이런 현상은 두드러진다.

성적이 높을수록 주위의 기대가 크고 그동안의 열매가 달콤했을 것이다. 학원에서도 상위 클래스에 속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성적이 떨어지면 일단 실패를 인정하기보다는 자신이 잃게 되는 모든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권력의 열매를 한번 맛보면 잃기 싫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어른들의 모습이 어느 정도 투영되어 있다고 봐야겠다.

 스스로 공부하기보다는 점수를 잘 얻기 위해 학원 선생님에게 의존하고, 숙제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인터넷에서 돈을 주고 숙제를 사며, 성적이 떨어졌을 경우 심지어는 부모 대행 알바까지 고용하여 학교 선생님께 데려가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존재이다.

물론 어른들도 그렇다. 공자도 40세가 되어서야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고, 50세가 되어서야 천명을 알았다고 하지 않는가. 아이들은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그것이 그들의 큰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니 스스로의 실패를 인정하고 자기 자신과 싸워 실패를 스스로 극복하고 나아가는 힘을 배워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이니 아이들은 조급해하고 실패를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100점 만점에 두 개를 틀리면 나머지 맞은 점수에 초점을 두고 칭찬하지 않고 틀린 두 개에 초점을 두어 ‘이건 왜 틀렸니?’ 하며 힐난하는 풍토. 아이들은 그 풍토 속에서 병들어가고, ‘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끊임없는 ‘반’으로 추락한다. 분명히 공부하고 ‘반’을 극복하며 하기 싫은 공부 해가며 노력했는데 결과가 100점이어야만 칭찬받는 사회. 그 점수가 한참 안 되는 아이들은 절망하고, 그 점수가 모자라는 아이들 또한 조급함을 배우게 된다. 그 속에서 어떤 아이들은 포기하고, 어떤 아이들은 자기변명 하는 아이로 자라나며, 어떤 아이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여 아예 시도하기조차 두려워한다.

  아무리 논술 교육이 중요하다 난리쳐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결과가 나지 않는 독서의 결과와 열린 수업은 아이들에게 이상한 수업일 뿐이다. 필기가 없는 논술 수업은 아이들에게 어리둥절할 뿐이다. 전체를 보는 눈을 길러주려고 여러 가지 사회 문제에 대해 수업을 하게 되면 아이들은 그게 수업이 아니라 딴 얘기인 줄 안다. ‘필기를 해야 외우고 시험을 봐서 칭찬받을 텐데.’가 무의식에 있는 것이다.

이런 풍토에서 프랑스같은 논술 교육을 실시하기란 어렵기도 한참 어렵다. 논술은 명확하게 답이 보이지 않는다. 찬성도 있고 반대도 있고, 찬성도 옳고 반대도 옳다. 하지만 이제까지 우리가 해온 교육은 맞는 것이 있고 틀리는 것이 있다. 틀린 쪽으로 가면 엄마한테 혼나는 것이다. 하지만 논술은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혼란스럽다. 선생님이 답을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그것도 빨리 알려주었으면 좋겠는데 왜 어려운 지문을 읽고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지 귀찮다.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려면 선생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렵다.

  부모님과 학교, 학원에서의 교육이 모두 그 풍토가 조성되어야 하는데, 우리 기성세대 역시 이런 열린 교육을 받아보지 못했으니 그런 풍토를 조성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방법을 알지 못해 그렇지 방법만 주어진다면야 뭐든지 아이를 위해 해보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다. 아이들에게 ‘정반합’의 원리를 가르치고 부모 역시 모순 없이 행해야 한다.

아빠는 실패를 한번도 안한 완벽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보다는 아빠도 어릴 때는 실패를 많이 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일어섰다는 경험담이 아이에게는 자신의 실패를 극복하고 아빠처럼 멋진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극복의지를 심어준다. 위인전을 읽는 효과를 주는 것이다. 아이에게 가장 중요하고 멋진, 최고의 위인은 자신의 부모일 테니까 말이다.

  아이가 실수하고 실패했을 때, 그 실수를 실수로 받아들이고 더 노력하도록 격려해주어야 한다. 아이들의 시행착오는 당연하다. 반에서 1등을 했다가도 10등으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이고, 그랬을 경우 혼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아이의 심정을 공감해라. 아이는 얼마나 속상하겠는가. 그렇게 공감한 후, 왜 그렇게 실패했을까 함께 대화하며 원인을 분석해보라. 그리고 엄마나 아빠가 ‘그러니 이거 이거를 했어야지’ 일장 훈계를 늘어 놓는게 아니라, ‘왜 이렇게 성적이 떨어진 것 같니?’라고 부드럽게 물어보며, 아이가 스스로 이것 이것을 안했던 것 같다고 이야기하게 하여서 자신의 실패를 스스로 인정하고 문제점과 해결책을 말하도록 해라. 그리고 나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모로서 도와줄 수 있는 것을 해주어라. 부모는 지배자가 아니라 든든한 조력자임을 아이가 알게 해야 한다.

  ‘반’에서 ‘합’으로 가는 것은 ‘정’에서 ‘반’으로 떨어진 이유와 원인을 분석함으로써 즉, 자기반성을 통해 ‘합’에 이르는 길을 분석하고, ‘합’에 이를 수 있다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합’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안 될거야..’라는 생각은 사실 열심히 공부해도 실패할 수 있다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다. 이것은 학교생활뿐만 아니라 후일 사회에 나가서도 직장을 잡으려는 시도조차 안하게 할 만큼 심각한 문제이다. 멋진 대기업이 아니면 실패한 인생처럼 자기 스스로를 비참해하게 되는 것이다. 작은 일부터 열심히 해서 작은 성공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어릴 때부터 길러지는 것이다. 10등으로 떨어졌을 때 열심히 공부해서 8등을 했어도 그 작은 성공에 기뻐할 줄 알아야 하고, 다시 제자리여도 그 과정에서 열심히 했음을 기뻐할 줄 알아야 후일 사회에 나가서도 처음에 하는 작은 일들에 최선을 다하고 그것이 결국 성공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더디더라도 기다려주는 것.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의 정확한 뜻을 가르쳐주는 것.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과 ‘자기반성’과 ‘스스로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것. 이 작은 가르침은 사실 아주 간단하면서도 매우 어려운 것이다. 최초의 교육자이며 최고의 교육자인 부모의 역할이 가장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혜 

현) 비타에듀(www.vitaedu.com) 인터넷 강사

 신설동 비타에듀학원 출강

케이스 2007학습지 해설강의

전) 강남 정일학원/ 부평 코리아에듀학원

     송파, 중계 이상수학원/ 스카이에듀학원

중곡동 전문가집단학원 등 다수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