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서울의 광화문 광장은 원래 육조거리가 있던 곳으로 멀리 경복궁의 정면에 광화문으로부터, 세종대왕 동상 및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는 공간입니다. 교보문고 본점이 가깝고, 길 건너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가 보입니다. 여기서 시청쪽으로 방향을 잡고 내려가면 옛 국회(오늘날의 서울시의회)가 나오는 등 주요 건물들이 모여있는 시내 중심가를 형성하고 있어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곳 지상 한 켠에는 부스가 하나 설치돼 있는데요. 옷을 빌려 입을(왕처럼 기념 촬영을 하라는 것이겠지요?) 수 있는 대여 공간이라고 합니다. 부스 위엔 서울특별시(로고) 세종대왕 체험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기자가 이 곳을 지나친 때는 이미 퇴근을 하고 서점 나들이를 한 시각이라, 부스 셔터문은 내려져 있었는데요. '왕옷체험 안내(띄어쓰기는 해당 게시물 기준)'라고 돼 있네요.
왕옷이라? 약간 생소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보통 상식적으로 왕의 신체나 궁중 관련 용어는 다른 어휘를 쓴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수라(밥)처럼 아예 다른 말을 쓰는 경우나 용안(얼굴), 어수(손)이나 용포(곤룡포라고도 함. 옷) 등 '용' 혹은 '어'를 붙여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간단한 몇몇 어휘는 대학에서의 학습을 요하지 않아도 보통 중등교육을 마친 시민은 교양 차원에서 접해 보았고 이해할 만한 범위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시는 그렇잖아도 오세훈 전 시장 시절까지만 해도 스토리텔링이 없는 도시, 역사없는 도시라는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박원순 시장 시대에 들어서서, 서울 소재 13개 전통가게를 소개한 책 '매력있는 서울, 전통상업점포 이야기'를 발간한 일은, 그래서 과거의 개발지상주의 경향을 반성하고 이야기 있는 생활의 터전으로서의 서울을 살려내자는 철학이 엿보이는 시정 케이스로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한켠에서는 약600년 서울 역사의 한 축인 왕실과 관련, 권위 파괴(의 탈을 쓴) 행보가 동시상영 중인가 봅니다.
물론 왕실을 되살려 입헌군주국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어딜 감히 왕실과 관련해 그 따위 단어 사용을…그 입 다물라!"란 소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시와 관련된 문화재와 문화유산을 경건한 마음으로 바라볼 줄 아는 것도 아까 말한 매력있는 서울의 한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관광 산업으로 먹고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닌 태국의 경우도, 제 아무리 타국의 관광객일지라도 왕궁이나 사원에 관광객이 입장할 때만큼은 민소매옷(속칭 소데나시)이나 반바지 등을 자제하는 에티켓을 발휘해 달라고 요구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므로 글자수를 조금만 더 늘려 곤룡포 대여(왕의 옷 빌려 드립니다)이라고만 적어놔도 한결 훌륭할 것 같습니다. 다시 박 시장 이야기로 돌아가는데요. 박 시장은 시장 선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세종대왕이 즉위 직후 3년간 백성을 구휼한 일화'를 언급했습니다. 가뭄이 들자 왕의 옷을 벗고 직접 구제 사업을 폈다는 이야기였는데요.
기왕 붉은 용포를 빌려줄 것이면, 권위를 무작정 파괴하고 쉽게만 설명을 달고 옷 빌려주기만 할 게 아니고, 제대로 단어를 갖추어 쓰면서, "지금 여러분이 빌려입는 옷에 이런 애민 사상이 담겨 있다"고 스토리텔링을 하면 좋겠습니다. 이런 소리를 하려면, 왕옷이라고 대뜸 '지르고' 나서는 제대로 말을 풀기가 어렵겠으니, 용포라 하고 이야기를 담아내었으면 합니다.
"더욱이 지금은 공화정이므로 그런 훌륭한 지도자를 우리가 뽑고 육성하고 감시할 권리와 의무가 있고, 또 누구나 인물만 되면 그런 지도자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점도 '임금님의 용포'를 빌려 주고 입으며 되새기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