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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기의 책보기] 에릭프롬의 사랑의 기술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기자  2012.05.05 10: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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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사랑을 연구대상의 학문과 산업으로 발전시킨 명저라고 한다. 표지는 흰색 바탕 위에 떨어진 고리 두 개를 끈이 엮고 있다. 사랑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엮어주는 끈이라는 암시로 이해하기 충분하다. 책 표지의 글 역시 연금술사 파라켈수스의 말을 간결하게 인용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을수록 사랑은 더욱 더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사랑의 위치만 달랐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박사의 명언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때에 보이는 것은 이전과 다르리라”와 같은 맥락이다. 어쨌든 사랑하는 사람은 이전과 달라진다는 것인데, 그런 사랑이 ‘기술인가? 아니면 누구나 운만 좋으면 겪게 되는 감정인가?’ 묻는 것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물론 기술이라는 것이 답이다.

원서의 제목은 ‘The Art(예술, 기술) of loving’이다. 우리가 흔히 들어서 익히고, 겪은 사랑은 춤, 연기, 노래, 때론 거짓말 등 인간의 모든 행위가 동시에 필요해 보였다. ‘그런데 왜 예술이 아니고 기술이지?’ 라고 생각하는 것,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가능한 생각이다. 읽고 나면 ‘기술’에 공감이 간다. ‘작업’의 고수가 밝히는 ‘작업의 기술’처럼 사랑도 부단한 시행착오의 과정과 인내,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다. 에릭프롬은 단정한다. 사랑은 어렵다, 의미를 배우지 않고 하는 사랑은 반드시 실패한다고. 그러니 음악, 건축, 공학처럼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제 2장, 이론으로서 사랑은 무엇인가. 매우 어려운 말인데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이 사랑이다. 필자의 짧은 철학적 지식으로는 사랑의 이론이 결론적으로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게 된다는 뜻으로 겨우 이해된다. 이론적 사랑의 결론,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주는 것이다. 유행가 가사에서 충분히 들었던 말인데, ‘받았으니 주거나, 줄테니 다오’ 같은 시장형 거래가 아니다. 참으로 줄 때, 나에게 되돌아 오는 것 역시 사랑, 그래서 사랑은 서로의 참여로 새로운 어떤 것을 탄생시키는 기쁨이다. 오로지 주는 사랑의 요소는 ‘보호, 책임, 존경, 관심, 지식’ 등이다.

사랑의 대상으로 분류되는 ‘형제애, 모성애, 부성애, 이성애, 자기애, 신에 대한 사랑’이 모두 위의 요소들로서 설명이 된다. 주목할 것은 이기적인 것과 자기애는 정반대라는 것이다. 자기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사랑하지 못한다. 이기적인 사람은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신에 대한 사랑 역시 궁극적으로 진리와 정의, 보편적 인류애, 선(善)이 최고의 가치로 몸에 배는 것이다.

제 3장, 그런데 현대사회는 사랑이 붕괴되어 버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기계적 부품과 거래의 대상이 됨으로써 ‘존경’의 가치가 삭제되는 대신 ‘모든 것으로부터의 개인의 소외’를 불러왔다. 자기애를 남용한 이기심이 사랑의 병리와 갈등을 줄지어 부르고 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사랑의 반석, 형제애는 사회 전체의 ‘공평과 공정’에 묻혀버렸다. 신(神)마저 정의와 진리에서 벗어나 주식회사 우주의 대표로서 동업자 신세로 전락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에릭프롬의 주장이다.

제 4장. 결국 우리는 사랑을 포기해야 할까? 아니다. 사랑의 실천을 위해 우선 사랑의 기술을 훈련해야 한다. 특히 사랑한다는 것은 몸소 겪어야 하는 개인적 경험의 영역이라 훈련도 개인적일 수 밖에 없다. 우선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정신을 집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고도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이다. 잡념 없이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 좋은 친구 만나기, 말 하기 보다 듣기(경청), 역동적 움직임, 자아도취 없는 객관 적 사고(이성),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것, 인내, 그리고 사회가 보편적 인류애, 사랑을 회복할 수 있다는 신앙적 믿음을 향해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사랑의 궁극적 도달점은 개인의 현상이 아니라 사회의 현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제가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경제의 도구가 돼버린 현대 자본주의 원칙과 사랑은 불행하게도 양립할 수가 없다. ‘양립하게 하려면 개인을 넘어 사회구조에 (중요하고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게 에릭프롬의 결론이다. 그 변화의 시발점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랑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것에 책임이 있는 사회적 조건을 ‘모두 함께 자아비판’하는 것이다.

   
 
때마침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의 신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나왔다. 박애, 평등, 자유, 정의, 진리 등 중요한 윤리적 가치들이 시장만능주의로 상실, 거래의 대상이 돼가는 것을 비판했다고 한다. 50 년의 간극을 두고 ‘사랑의 붕괴’에 대한 두 석학의 우려가 일치하는 대목이다.

‘작업의 기술’ 정도로 생각하고 덤비기에는 너무나 너무나 어렵고 난해한 책이다. 에릭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하려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 프로이트, 헤겔 정도는 미리 알고 덤비는 것이 좋겠다.

프라임경제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