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앞의 두 가지 경영원칙에 비해 세 번째의 ‘현실을 인식한 경영’은 다소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원칙을 벗어난 경영을 허용할 수도 있는 표현을 왜 경영원칙 속에 포함하느냐는 원론적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망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기적 기업의 지상과제(至上課題)에 눈을 돌리게 되면 경영환경을 무시하고 정도(正道) 경영만을 주장하는 일은 경영비평가의 역할이지 경영자의 역할이 아니다.
이 글 연재 시작의 모두(冒頭)에서 끄집어냈던, 와병 중의 최종현 회장의 후계 지명 에피소드를 기억하는 독자는 기억할 것이다.
후계를 아직 경영능력이 입증되지 않은 회장의 아들로 지명하기로 한다면, ‘떠나야 한다’는 것이 천년가는 기업을 만들기로 하여 모인 SK 기업인들의 약속이라고, 집요하리만큼 되풀이해온 당신의 기업관은 어떻게 되는 거냐는 원론적 힐난(詰難)에 대하여, 최 회장은 고뇌에 찬 답변을 “You들이 좀 봐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너털웃음으로 포장하여 제시하였다.
그의 대답을, 필자는 ‘현실을 인식한 경영’이라는 바로 이 세 번째 경영원칙에 입각하여, 자연인 최종현이 ‘의제(擬制)된 인격체, 기업’에게 한시적(限時的) 유예를 구하는 장면이라고 평술(評述)하였었다. 독자 여러분도 ‘천년가는 기업 SK’를 염두에 넣고,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난 뒤에는 이 결정이 SK가 당시 처했던 경영환경을 고려할 때, 어떻게 평가될 것인지, 이 대목을 찬찬히 음미해보시기 바란다.
필자도 비록 엔지니어로 기업 인생을 출발하기는 하였으나, 어쩌다 경영대학원을 귀동냥하고, 다국적 기업 걸프와 정부의 합작기업인 유공에서 남들의 선망을 받는 직장경력을 쌓기도 하였다. 또 훗날 경영자로 성장하여 다른 유수한 다국적기업과 합작기업을 만들어 운영해보기도 하면서, 서양의 이른바 선진(先進) 경영법을 남보다 일찍 접해보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남의 경영법을 무조건 받아들이기를 주장하는 일부 해외유학파 인사들의 편향된 사대주의적 경영 사고는 우리나라 사회규범과 구성원 정서에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동시에 깨닫게 된 바가 없지 않다.
“왜 사업권을 반납해야 합니까? 대통령 사돈 기업이라 해서 SK가 여러 가지 사업 기회에 근신(勤愼)해 온 것은 정부나 재계(財界)에서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한 트럭도 넘는 사업계획서와 설명자료 다 정정당당하게 심사 받고 따낸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이제 내어 놓으라니요?”
실무자의 푸념이 아니었다. 노태우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가던 20여 년 전 당시, 제2이동통신사업 사업권 경쟁을 승리로 이끈 개선장군인 그룹의 한 고위 임원이, 회장 앞에서 흥분하며 피를 뱉듯이 토로한 말이다. 그가 최 회장에게 ‘근거도 없는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는 당시 정치권의 사업권 반납 요구에 정면 대결하자’고 외치는 자리에 우연히 있어 어깨 너머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우리나라 통신 최고 기업 SK텔레콤의 탄생엔 고 최종현 회장의 독특한 ‘경영 혜안’ 토대가 있었다. |
되고 싶어 된 대통령 사돈도 아니고, 은인자중 하여야 하는 회장 심경(心境)의 이면(裏面)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사업에는 때가 있는 것 아닌가? 발을 굴렀었다.
아니나 다를까? 필자가 답사를 하는 중에 승용차 바퀴 빠져 생고생하던 황금도 앞 서산 해변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현대, 삼성이 경쟁적으로 석유화학 컴비나트를 건설하게 된다. 필자가 계획하였던 대로 SK가 이곳에 설비증설을 선제(先制)하였더라면, 뻔히 내다보이는 이들의 무모한 설비경쟁 결과로 세계 석유화학업계가 몸살을 앓던 이후 10여 년의 공급과잉(downturn)은 아마 방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깨끗이 반납해. 그 사람을 잘 알잖아.”
회장의 그 말 한마디로 ‘분하지만’ 제2이동통신 사업권 반납이 결정되었다.
기업경영이란 기업을 망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현실을 인식한 경영’을 이보다 더 웅변으로 증언하는 사례가 어디 있을까?
사족(蛇足)이지만 조금 더 서술해 보자. SK가 반납한 제2이동통신 사업권은 코오롱과 포항제철의 컨소시엄으로 넘어가게 된다. ‘SK에게 이동통신사업은 물 건너 간 것 아닌가’ 하고 모두들 낙담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국영기업이었던 한국이동통신의 민영화 이슈가 불거지고, 첨예한 이슈에 부담을 느낀 이른바 문민정부(文民政府)는 그 실수요자 선정을 전경련(全經聯)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위임하였다.
회장인 최종현 회장이 이해 당사자로서 불참한 전경련회의에서는 만장일치로 SK를 그 실수요자로 선정하게 된다. 이런 일들이 일어난 후, 어느 기회엔가 필자는 궁금증을 못 이겨 최종현 회장에게 물었다.
“이렇게 진행되는 구상(構想)을 미리 염두에 두셨던 건가요?”
이것도 당신의 Supex 추구 중 하나였느냐고, 바둑 고수(高手)가 그렇듯, 앞을 훤히 내다 본 것 같은 그의 혜안에 대한 감탄과 다소의 아첨까지 섞인 질문이었다.
“아니야.”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사업권 반납이 곧 이동통신사업의 포기는 아니라는 정도의 일관된 생각을 가졌을 뿐이었지.”
그러더니 최 회장이 재미있다는 듯이 내 눈을 빠안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전경련이 나를 빼고 자기들끼리 자율적으로 결정해서 우리에게 한국이동통신을 맡겼는데, 그것을 SK에 대한 재계의 진정한 호의라고 생각하나?”
“… …”
필자는 무슨 이야기인지 짐작이 가지 않아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거기 있던 사람들이 다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SK 너 혼 좀 나봐라’ 하고 고소해 하는 사람들도 필시 있었을 거야. 복마전이나 마찬가지인 국영기업체 인수해서, 그걸 가지고 새로 출발하는 민간기업 제2이동통신과 정면 경쟁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뻔히 아는 사람들이거든.”
그런 셈법도 있었구나, 나는 현실의 다른 단면(斷面)을 쾌도난마처럼 잘라 보는 최 회장의 날카로운 식견에, 이번에는 아첨하는 마음 조금도 없이 진심으로 탄복했다.
“그래도 상관 없어. 우리에게는 SKMS, Supex가 있잖아?”
최종현 회장의 이야기는 언제나 이렇게 그의 사장학으로 끝맺어졌었다.
‘현실을 인식한 경영’.
시시때때로 변하는 환경을 인식해 이에 거스르지 않고 때로는 실려 가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경영의 목표와 원칙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
‘최종현 사장학’에서는 위에 기술한 세 가지 원칙이, 기업관, 기업경영의 정의/목표 등 약속과 함께 경영이념을 형성하여, 말콤머그리지의 개구리와는 달리, 변화를 인식하고 이에 대응을 가능케 하는 기업경영의 항온(恒溫)으로 작동하고 있다.
[경영기본이념 끝, 다음 회엔 ‘동적요소’ 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