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자원(resource)을 위주로 경영하라는 첫 번째 경영원칙에 뒤이어, 최종현 회장은 ‘합리적 경영’이라는 두 번째의 경영원칙을 제시하였다. 경영 상의 제반 일과 현상을 실증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사회규범에 비추어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하여, 멋 있는 방법으로 집행하라는 것이다.
합리(合理)라는 명제를 나누어 세 가지의 단계를 거치도록 정의하고 있음이 눈에 뜨인다.
분석은 실증과학적(Positive Science)으로
판단은 사회 규범(Social Norm)에 비추어
집행은 멋(Art) 있는 방법으로 하라는 것이다.
‘멋 있는 방법’이라는 말이 알 듯 모를 듯, 미묘하므로 그것도 정의하였다. 조화(調和)의 미(美)를 근간으로 집행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의 저자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와튼 스쿨(Wharton School) 교수가 주장한 바, ‘협상력은 논리보다 공감을 추구함으로써 얻어진다’는 말을 상기(想起)하게 하는 통찰을, 이미 최종현 회장은 그 시점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힘, 협박, 파업, 비난 등으로 상대방을 압박하면, 들인 노력에 비해 얻어낼 수 있는 파이(pie)가 작아진다’ 대신 ‘상대방의 생각과 감성을 이해하고 존중할수록 얻는 대가가 더 커진다’고 강조했다.
조화의 미를 근간으로 하는 멋 있는 집행, 바로 같은 이야기를 다른 방법으로 서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햅쌀이 나왔을 무렵이니까 어느 해인가 초가을이었다.
Supex 보고를 하러 회장실에 모여 우선 점심 식사를 하는데, 기름 자르르 흐르는 햅쌀밥이 나왔다. 마침 동석했던 임원 중에 여주 출신이 있었는데, 무심코 “이거 여주 쌀이네요” 하는 자기 고장 쌀 자랑이 나왔다.
회장이 웃지도 않고 그 임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물었다.
“You 들은 여주 쌀이 맛있나?”
“네 맛있지요.” 여주 출신 임원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왜 여주 쌀이 맛있는지 아나?”
“네?”
“미국에 가면 말이야, 여주 쌀 같은 것은 맛없고 스티키(sticky) 하다고 해서 태국 쌀보다 인기가 없거든. 그래서 값도 싸고.”
“아 그거야…”
거기서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더니, 식사 후 자리를 옮겨 과일로 후식을 하면서 최 회장이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우리나라 사람의 입에는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쌀로 지은 밥이 더 맛이 있지. 그건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름 섭취가 부족했던 때의 인식과 선호가 그대로 기억 DNA 속에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인 거야. 서양 사람들은 다양한 다른 소스로부터 기름기를 섭취하기 때문에 굳이 쌀로부터 기름기를 섭취할 필요가 없으므로, 쌀은 구수한 ‘long grain’ 태국 쌀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거지.”
그러더니 다시 여주 출신 임원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그런데, 자네 동네 여주 쌀은 왜 기름기가 많은가?”
“… …”
“거 봐, 모르지?”
회장이 짓궂게 웃자, 여주 출신 임원은 어리둥절 바보가 되고 모두들 영문 모른 채 따라 웃었다.
“논물이 차가워서 그런 거야. 여주 이천 지역의 논은 하늘만 바라다보는 천수답(天水畓)이 아니라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끌어 관개를 하는 논이 많거든. 그러니 차가운 물의 온도에 대항하여 벼가 스스로의 배아(胚芽)를 보호하려고 기름기를 더 만들어 그걸 눈(芽)에 씌워 보온(保溫)을 하게 된 것이지.”
그러고 보니 최 회장은 도미(渡美)하여 시카고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기 전에, 당시 수원에 소재했던 서울대 농대(農大) 농예화학과를 졸업한 농학도 출신이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별 것을 다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뒤 이런 일도 있었다.
유공(油公)이 여의도에 사옥을 새로 짓고 이사 간 뒤 얼마 안된 때의 일이다.
회장이 새 사옥을 둘러보러 와서 구내식당에서 임직원이 먹는 밥을 시식(試食)해 보았다. 모두들 긴장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회장 앞에 앉아 식사를 같이 하며 하회를 기다리던 인사총무 담당임원이 혼쭐이 났다.
우선 밥이 틀렸다는 것이다. 밥알이 살아 있어야 하는데, 떡이 되어 있으니 불합격. 또 국을 맛있게 끓인 것까지는 좋은데, 반찬의 가지 수가 너무 많은 것이 또 문제. 마지막으로 지적된 것은 김치였다.
“김치가 틀렸어. 김치가 맛있어야 다른 반찬의 가지 수를 줄일 수 있는데, 김치를 잘못 익혔어. 김치는 물 속에서 익혀야 하는데 말이야.”
김치를 물 속에서 익히라니? 수수께끼를 풀다 못한 담당 임원이 넌지시 내게 청해 왔다. 당신이 언필칭 회장의 기쁨조라니, 좀 멍청한 질문을 하더라도 핀잔은 당하지 않을 것 아니냐? 다음 번 회장 브리핑 끝난 자리에서 김치를 물에서 익히는 비결을 넌지시 물어봐 달라는 것이었다.
다음 Supex 보고 끝난 뒤에 기회가 오자, 필자는 이리저리 돌리지 않고 최 회장에게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식당 담당자가 아무래도 모르겠다는 데요. 김치를 물에서 익히라는 말씀은 어떻게 하라시는 겁니까?”
회장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이 친구들아, You 들은 김장 담는 것도 못 봤나?”
“… …”
“배추 씻어 양념해 독에 넣고, 소금물 부어 간 맞추고 그 다음에 어떡하든가?”
“… …”
“큼지막한 돌 하나 주어다 그 위에 얹고 뚜껑 봉하지?”
“네.”
“그 돌을 왜 얹는다고 생각하나?”
그러고 보니 한번도 그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발효를 일으키는 균에 두 종류가 있어요. 염기성(厭氣性)과 호기성(好氣性). 염기성은 공기를 싫어하는 균이고, 호기성은 공기를 좋아하는 균이지. 그런데 김치를 잘 익히려면 염기성 균에 의한 발효를 촉진해 주어야 하거든. 호기성 균에 의해 발효가 되면 김치가 군내가 나서 먹을 수 없게 되는 거야.”
그러니 김치는 국물 속에 푹 담가서 익혀야 한다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공 식당 담당 임원의 고민이 해결되었을 뿐 아니라, 이 실증과학적 원칙에 의해 ‘국물 속에서 익힌 김치’가 발전하여 마침내 워커힐호텔이 자랑하는 ‘수펙스 김치’가 되었다.
우스개처럼 적었지만, 이것이 최 회장의 실증과학적 태도였다.
음력 달력에 적힌 24 절기가 태양력(太陽曆)이라는 점도 그에게서 배웠다. 그는 단호한 이중과세(二重過歲) 반대론자였으며, 김영삼 대통령 때 정치적 목적에 의해 부활한 구정(舊正) 지내기를 못내 못마땅해 했다.
전경련 회장 재임 시, 정관계(政官界)에 많은 적(敵)을 만들면서까지 그가 끈질기게 이자율 한 자리 수 하향조정을 주장하였던 것 역시 여러 사람들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한 자리 수 이자율에 익숙해진 작금에 이르러서 보면, 이것 역시 최 회장이 실증과학적, 합리적 원칙에 입각하여 우리나라 기업들의 경영환경을 통찰한 결과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장례문화를 개혁하여 누구나 화장(火葬)을 하여야 한다고 주창(主唱)하고, 본인 자신의 유체도 화장하도록 신칙(申飭)하는 유언을 남긴 것은 쉽지 않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으로 널리 알려진 일이다.
여기까지가 그의 '합리적 경영'의 정의이며, 사장학을 이루는 경영원칙의 두 번째가 된다.
[다음 회에선 ‘세 번째 경영원칙’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