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캔미팅(Can Meeting)이 대략 20회차 쯤 진행되었을 때 이들 수재형 엔지니어들이 다시 캔미팅에에 복귀한 것이 기록에서 발견된다. 그냥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변화된 태도를 가지고 복귀하는데, 현장에서 수고하는 기름 묻은 작업복 운전원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수평적 태도로 복귀한다는 것이 의미 있는 점이다.
이때 비로소 참된 의미의 캔미팅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팀원 간에 수평적 관계,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는 공감적 커뮤니케이션의 환경이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한번 마음이 열리면, 수재들의 개인창의력과 현장직원들의 ‘자갈 뒤집어 가재 잡기’ 실천력이 혼융되어 전 구성원의 능력이 결집되는 시너지 차원의 집단창의력이 발현되기 시작한다. 비로소 본격적인 팀 단위 Supex 추구가 시작되는 것이다.
필자가 코칭 전문가 과정을 밟으며 나중에 깨닫게 된 일이지만, 그룹 코칭(Group Coaching) 전문코치의 도움을 받으면 이 초기 단계의 커뮤니케이션 난관이 훨씬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애석하게도 이 일들이 추진되던 1990년대 초반 당시에는 코칭이라는 개념이 아직 이렇다 하게 알려진 것이 없었다.
앞의 펌프 문제의 경우 약 50회차가 지나서 한 현장 엔지니어가 조심스럽게 ‘펌프를 없애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게 되었다. 이런 제안이 만약 캔미팅의 초기에 제기되었다면 그 제안자는 아마도 여러 책상물림 엔지니어들의 호된 빈축을 사게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펌프를 없애면 어떻게 압력이 낮은 탑저(塔底) 부분에서 압력이 높은 탑정(塔頂) 부분으로 물질을 이동시킬 수 있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는 제안이라고 백안시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50회차의 캔미팅을 통해 자신과 다른 의견의 가치를 깨닫게 된 구성원들의 태도는 달랐다.
“아, 그렇겠네요. 펌프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펌프를 없앨 수도 있겠구나! 정말 참신한 발상이네요.”
그렇게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되니, 오히려 펌프를 없애고 압력 구배(勾配)를 바꾸어 흐름을 만든다면 어떤 불리한 문제가 생길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탑저 부분 제1 반응기의 압력을 높이고 탑정부분 제2 반응기의 압력을 오히려 낮추어 조업한다. 아니 차라리 투입 원료를 제2반응기에 먼저 투입하여 중력에 의한 흐름이 생기게 하면 어떤가 등, 아이디어가 속출하고, 결국은 이익을 더 내는 것이 목표이니, 이 경우 생기는 반응효율 감소가 펌프로 인해 3개월 마다 조업 중단을 감수하는 것에 비해 견딜 만 한 것인가 어떤가 경제성의 문제로 바꾸어 검토하는 것도 고려되었다.
이어서 파이프 토막을 잘라 모의 반응기를 만들고 압력조건을 바꾸어 가며, 여러 다른 압력조건 하에서의 반응효율 측정 실험을 진행하게 되었고, 실험 결과로 펌프를 없애도 무방하다는 것을 입증할 만큼 반응효율의 감소가 미미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뿐인가, 반응 모사(模寫) 실험을 통해 변화된 압력 조건 하에서도 반응 효율을 극대화 시켜 종전 특허권자의 설계치보다 수율(收率)을 더 향상시킬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발견되었다. 특허권자의 엔지니어가 책상머리에서 계산한 수율(yield)을 작은 간이 모사실험을 통해 개선할 수 있음을 발견한 것이었다.
총 80여 회의 캔미팅 끝에 이 과제는 마침내 현장에서 펌프를 들어내고, 두 반응기의 압력조건을 변화 시켜 조업함으로써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공정설계를 제공했던 특허권자가 얼씨구나 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집해가서 자신들의 새로운 공정 설계에 활용하였던 것은 물론이다.
SK에너지 직원이 베트남 정유사 직원들에게 공장 파이프 점검 요령을 설명하고 있다. |
그러나 많은 어려움과 구성원 간의 갈등도 겪었지만, 마침내 80회차의 Supex 추구 캔미팅 그 대장정(大長程) 끝에 성공체험을 얻게 된 구성원들의 모습을 한번만 열린 마음으로 상상해 보시라.
패기와 의욕, 두뇌활용을 통해 얻어낸 창의적 결과에 대한 긍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긴 말 필요 없이 눈빛만으로 이미 소통이 이루어지는 구성원 간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의 완성이 그들 간에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이들은, 이 일 있은 후에 함께 투입된 유사한 공정개선 Supex 추구 과제 수행 과정에서, 이미 이루어져 있는 소통의 기틀을 활용, 빠른 시일 내에 의기투합하여 시너지를 발휘 함으로써, 지루하기도 했던 첫 번째 캔미팅의 초기 갈등과정이 결코 낭비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웅변으로써 입증하였다.
“펌프가 문제면 펌프를 없애라!”
이 캐치프레이즈는 이후 한동안 캔미팅의 대장정과 성공체험, 그 선순환(善循環)을 지칭하는 말로 그룹 Supex 추구 관계자들 속에 풍미하였다.
자, 앞의 8강, 9강에서 논의한 개인창의력 텍스트까지 되돌아 요약해 보자.
무엇이 선임운전원인 교대반장으로 하여금 위험을 무릅쓰고, 얼뜬 보기에는 유치한 진흙 바르기와 걸레 동여매기 발상을 실천에 옮기게 함으로써 전 공장이 3일간이나 운전 정지하게 되는 긴급조업중단 위기를 벗어나게 하였는가?
무엇이 잦은 펌프 고장으로 인한 조업 손실을 없애려는 목적으로 똘똘 뭉친 구성원들에게 대장정의 80회 캔미팅 회합을 가능케 하여, 마침내 집단 창의력의 결과로 ‘펌프가 문제면 펌프를 없애라’고 하는 제3의 대안을 만들게 하였는가?
이 탁월한 성과들이 다 무엇으로부터 수확되었는가?
기업과 그 구성원이 공동추구 가치를 직접적으로 ‘이익 또는 이윤’ 창출에 둔 것이 아니라 ‘창의력’이라는 나누어 줄지 않는 가치에 둔 데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이처럼 최종현 사장학이 추구하였던 기업과 구성원 간의 공동 추구 가치는 ‘창의력’이었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가 만든 텍스트에는 ‘창의력’이라는 단어가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데 묘한 매력이 있다.
결과물인 창의력을 내세우기 보다 그 프로세스인 두뇌활용(Brain Engagement)과 캔미팅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자꾸만 개념의 덫에 걸려 정체(停滯)하게 되는 통상적(conventional) 경영법의 병폐를 경계한 것이 바로 그 심모원려(深謀遠慮)였던 것이다.
[다음 회에선 ‘두뇌활용과 창의력’ 마지막 편을, 그 다음 회부터는 ‘경영기본이념’ 편을 이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