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당장 돌아가라.”, “당신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됐다.”
옛 통합민주당(이후 민주당이 됐다가 다시 현재 민주통합당이 됨) 소속이던 천정배 전 의원이 촛불 집회 현장에 나섰을 때 시민들은 강력히 항의했다. 2008년 6월26일 밤의 일이었다.
광우병 쇠고기 괴담, 그리고 MB정부의 소통 불능 상황에 흥분해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민주당쪽 정치인들도 한통속 내지는 시민들 뒤에 숨어있는 비겁한 야당으로 봤다. 이는 천 전 의원에게도 가차없이 적용된 ‘룰’이었다. 사람들은 직전 정권인 참여정부에서 법무부장관을 지낸 이로 천 의원을 기억했지, 쇠고기 문제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추진에 소신껏 반대, 단식까지 했던 그의 소신을 기억하지 못했다.
천 전 의원은 목포 3대 수재로 일컬어지며 서울대에 진학, 이후 사법시험 합격까지 순조로운 길을 걸었다. 하지만 군법무관으로 병역의무를 이행하던 시절 뒤늦게 의식화되면서 독재정권이 주는 판·검사 임명장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 바로 변호사 개업을 했다.
이후 ‘꽁지머리를 묶은 변호사’ 등 저서를 내기도 했던 천 전 의원은 15대 국회에 입성한 이후 줄곧 소신파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대선 예비후보로 도전장을 내민 바도 있고 지역구를 안산에서 서울로 옮기게 된 이유도 지난 번 ‘급식 찬반투표’ 격으로 벌어진 서울시장 선거에서 시장직에 도전하겠다고 다소 빠르게 치고 나간 바람에(의원직 사퇴 선언) 이뤄진 감이 없지 않다. 물론 이 적진 한 복판에서의 출마로 평가되는 송파을 출마는 당이 수도권 주요 지역 바람몰이 정국에서 거물을 모신 결과라고 총평하는 게 더 정확하다. 이전에 동국대 강정구 교수 문제를 놓고는 검찰에 법무부장관으로서 교과서상에서만 존재했던 ‘지휘권 행사’라는 강수를 둔 일화도 있다.
그런 그이지만 동시에 수석원내부총무, 원내대표 등을 역임한 조직력을 갖춘 인물이라는 다른 면모도 있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천 전 의원 측보다 자신이 표 관리를 못해 원내대표를 못 했다고 회고록에서 쓴 적도 있다. 당 헤게모니를 놓고 추미애 의원을 지원사격, 정세균 의원(전 당대표) 진영과 대결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천정배 전 의원이 총선을 앞둔 바쁜 일정 중에 부인과 함께 야구장을 찾았다. 천 전 의원은 이번 19대 총선에서 송파을에 출마, 낙선했지만 새누리당 텃밭인 강남3구 한복판에서 선전하면서 중앙정치인으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것으로 보인다. |
천 전 의원은 그런 오랜 저평가 국면을 이번 송파을에서의 패전(혹은 선전)으로 불식하는 데 성공했다는 풀이다.
12일 0시를 갓 넘긴 시간대에 97.06% 개표 상황 기준으로, 새누리당 공천장을 받은 유일호 당선자는 4만7718표(49.17%)를 얻었다. 같은 기준으로 보면 천 전 의원은 4만5385표(46.76%)를 기록, 2000여표 차이까지 따라붙는 기염을 토했다.
새누리당 일각에서는 서초·강남·송파의 일명 강남3구에서 철옹성이 천 전 의원 때문에 무너지는 것인지 걱정할 상황이었다. 이번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야당의 정권심판론 공세에도 불구하고 우세를 점하고, 대선가도에서 유리한 고지를 획득한 점을 고려하면 천 전 의원이 적진 중심에 육박해 얻어낸 전공은 더 값지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번 선거를 진두지휘한 새누리당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대세론을 확인하며 유력한 주자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했다는 점을 고려해 보자. 이런 ‘박풍’ 와중에 야당의 대표적인 대선주자급 인물인 정동영 전 최고위원도 날아간 점도 감안하면, 지역구를 옮긴 급박한 상황에 천 전 의원이 거둔 인물론의 성적표가 벼락치기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편으로 해석 못할 바 아니다.
이제 금배지는 잃었지만, 천 전 의원은 중앙에서도 적진 한 복판에서도 이슈화될 수 있는 자기 브랜드를 확실히 얻는 데에는 성공했다. 19대 총선을 치른 그의 행보가 다른 여러 여야 중진들의 낙선과는 다른 행보로 이어질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천 전 의원의 이후 정치 여정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