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3월27일 오전, 울산 현대중공업 본사. 다소 바람이 불긴 했지만 기온이 영상 10도를 웃도는 포근한 날씨 속에 한진해운 컨테이너선 명명식이 열렸습니다.
“나는 이 배를 ‘한진수호’로….”
선박 명명자로 나선 최은영 회장의 목소리가 어쩐 일인지 “한진수호”를 끝으로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지근거리서 지켜보던 임직원들은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한다’는 분위기였죠.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최 회장이 나머지 명명사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 명명하나니, 이 배와 모든 선원들에게 신의 축복과 가호가 깃드소서.”
앞선 상황에서 엿볼 수 있듯 최 회장에게 이번 명명은 그 어느 때보다 의미가 남다릅니다. ‘한진수호’호가 국내 첫 1만3100TEU급 컨테이너선이라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남편 고 조수호 회장의 이름을 따 선박명을 ‘수호’라고 지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1만3100TEU급 규모의 ‘한진수호’호는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380m)과 맞먹는 높이라고 합니다.
고 조수호 회장의 미망인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이 '한진수호'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제공= 한진해운. |
평생 전업주부로 살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 뒤를 이어 2007년 경영일선에 뛰어든 최 회장에게 ‘한진수호’호는 남편이름 이상의 의미를 가질 겁니다. 특히 사상 유례 없는 불황에, 엎친 데 덮친 격 고유가와 원화강세까지 겹쳐진 요즘, 최 회장에게 필요한 건 남편의 따뜻한 격려 한마디가 아닐까요.
그도 그럴 것이 고 조수호 회장은 생전 ‘로맨티시스트(낭만주의자)’였다고 합니다. 짬이 날 때마다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 데요, 실제 조 회장은 딸들을 위해 주방에서 요리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얘길 대놓고 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최 회장이 2008년 7월 매일경제와 했던 인터뷰 내용 중 일부입니다.
“조 회장께서는 1년에 150일은 해외출장을 다녔기 때문에 한국에 오면 주로 온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냈어요. 일가족 4명이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교보문고에서 책 사고 미술관 구경을 하곤 했죠.”
조 회장이 골프나 술을 좋아하지 않는 대신 그림에 조애가 깊었다는 게 최 회장 전언인데요, 한진해운이 주최하는 ‘양현미술상’도 조 회장 유지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양현(洋賢)’은 조 회장의 호이기도 하죠.
슬하에 딸 둘을 둔 조 회장은 열혈 ‘페미니스트(남녀평등주의자)’이기도 했는데요. ‘여성은 배에 태우지 않는다’는 해운업계 금기를 깨고, 1995년 국내 최초로 여성 해기사 12명을 선발해 업계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또 1997년에는 여성주재원을 파견했으며, 2000년에는 최초 여성 일등항해사를 배출하기도 했죠.
그렇다고 호락호락한 상대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조 회장은 철저한 ‘완벽주의자’이기도 했는데요, 그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대충대충’이었다고 합니다. 해운업의 생명이 서비스인 만큼 매사에 완벽한 수송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게 조 회장의 경영철학이었다고요.
다음은 조 회장이 직접 쓴 경영인 칼럼입니다.
“뭐든지 적당히, 되는대로 하다가 안 되면 그만두고, 힘든 일을 뭐 하러 해, 어차피 월급은 나오는 걸, 저축이 웬말, 한탕이면 족한데…. (생략) 수년 전의 적당주의가 급성이라면 요즈음의 적당주의는 만성에 가까운 듯 싶다. (생략) 이러한 적당주의자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음은 국제화 시대를 표방하는 우리 현실에 있어 참으로 개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생략) 완벽주의의 실천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시급한 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1994년 7월11일 동아일보》”
조 회장의 완벽주의는 80년대 초 심각한 해운불황에서도 한진해운을 세계 굴지의 해운회사로 키우는 데 밑거름이 됐습니다.
조 회장이 본격적으로 경영에 참여한 1984년은 미국 최대선사였던 US라인이 파산할 정도로 업계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한진해운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죠. 1979년 47억원이던 적자폭은 1980년 120억원으로 순식간에 불어났습니다.
그러나 최 회장은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았습니다. 경제성이 떨어진 노후 비경제선을 과감히 처분하고, 에너지절약형 신경제선을 사들였죠. 또한 선박 자동화로 선원수를 줄이는 등 가격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경영전략을 구사했습니다.
그 결과 한진해운은 국적선사로는 최초로 1992년 운임수입 1조원을 돌파했으며, 1995년에는 국내 해운사상 최초로 2조원(1조9161억원)에 육박하는 매출실적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실력만큼이나 조 회장이 지닌 국내외 직함만도 수두룩했는데요. 안으로는 1994년 한국선주협회 초대 홍보위원장에 이어 1999년 제20대 회장을 지냈으며, 밖으로는 북미항로안정화협정 제4대 회장, 발틱국제해사협의회 집행위원을 역임했습니다.
조 회장은 또 업계서 알아주는 ‘국제통’으로 통했습니다. 1991년 우리나라가 국제해사기구 상임이사국 가입을 위해 발 벗고 나설 때 정부가 그를 로비스트(?)로 낙점할 정도였죠. 당시 조 회장은 각국 대표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협력을 요청, 결국 이사국 선임을 이뤄내 이듬해인 1992년 해운항만청으로부터 공로패를 받기도 했습니다.
얘기를 쭈욱 늘어놓고 보니 최 회장이 명명식 때 왜 울먹였는지 공감이 가는 데요. 아무쪼록 최 회장과 한진해운의 앞날에 조 회장의 가호가 깃들길 바랍니다.
[용어설명] TEU(Twenty-foot Equivalent Units): 가로 20피트(6.1m)‧폭 8피트(2.44m)‧높이 8.5피트(2.6m)짜리 컨테이너 박스 1개를 일컫는 단위로, 컨테이너선 적재 용량을 표시할 때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