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그것도 말은 되지. 최 회장은 자나 깨나 ‘SKMS/Supex’ 빼놓으면 다른 일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회장의 일과를 살펴보면 그랬다.
아침 운동, 기(氣)체조와 단전호흡을 마치고 10시30분 출근, 1시간쯤 책상머리에 놓여진 그날의 요약보고서를 읽고 나면, 회장실 옆 전용 식당에 그날의 번호표를 받은 어느 회사인가의 Supex 보고팀이 점심식사 준비 완료 태세로 대기해 있게 마련이었다.
회장이 입장해 좌정한 후 그날 보고 팀과 식사 팀의 명단을 경영기획실 배석 임원으로부터 넘겨받아, 꼼꼼히 거기 앉은 보고 팀원의 면면과 맞추어 들여다보고, 육개장이었든, 계절 별미든 그날의 식단에 맞추어 식사가 시작된다. 특히 최종현 식 육개장은 맛있다는 정평이 있었다. 한우 양지 살을 잘 고아 맛을 낸 맑은 장국에, 장조림처럼 칼 대지 않고 손으로 찢은 고기, 제 기름에 볶은 고추장이 따로 종지에 담겨 나왔고, 합에 담겨 나오는 밥이 늘 자르르 윤이 흐르고 촉촉하면서도 밥알이 살아 있었다.
식사 끝나면 소파가 놓인 옆방으로 옮겨 과일 등 후식을 먹은 뒤, 그날의 Supex 보고가 시작되는데, 해당 사장 또는 관련회사가 있는 경우 관련사의 사장이나 임원이 배석하는 것이 상례였다.
보고가 끝나면 회장의 피드백(feedback)이 있는데, 이 시간이 보고자 뿐 아니라 해당 사장들까지 가장 긴장되는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너무 친절할 정도로 SKMS나 Supex 추구에 대한 회장의 교육이 이어지는 경우는 일종의 기합(氣合)으로서, 그날의 보고는 깨졌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었다.
취미가 아니고는 회장이 그처럼 똑 같은 이야기를 질리지도 않고 되풀이 한다는 것이 불가능 하다고 입들을 모아 '취미생활'이라는 뒷말이 생겨난 것이었다.
“SK의 언어(language)시스템.”
누군가가 중심을 잡고 말했다. 이 정의(定義)는 실은 ‘017’ 제2이동통신 합병할 때, 그 임직원들에 대한 SKMS 교육에서 필자가 처음 창안해 쓴 말이었다. SKMS 교본 들여다보며 뜨악한 표정으로 앉은 중견간부 수강생들을 보고 내가 물었다.
“여러분들 미국이나 캐나다 뒤늦게 이민 간 친지들이 있지요?”
“네.”
“그 분들 그 사회에 정착할 목적으로 처음 한 일이 무엇이었나요?”
“…”
“영어를 배웠죠. 그렇지 않나요?”
직원들과 함께 사내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고 나오는 고 최종현 회장의 소탈한 모습. |
“SKMS[SK경영관리체계]는요, 여러분 생각이 맞습니다. ‘마른 행주 한번 더 짜자.’ 뭐 그런 정신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아요. 그러나 짜기는 짜는데, 구성원의 물리적 노력이나 노동(physical engagement)을 쥐어짜자는 것이 아니고, 두뇌활용(mental engagement)을 쥐어짜자는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요, physical engagement는 힘들고 짜증이 나는데, 두뇌활용의 경우는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발적으로 두뇌 쥐어짜기가 일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런 얘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우선 SK 문화가 사용하는 언어와 그 언어의 겉 구조 밑바닥에 들어있는 사고방식을 익혀야 할 것 아닌가요?”
그래서 등장한 말이 ‘Language System’이라는 표현이었다.
“다 그럴 듯한데 말이야.”
내가 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어때? ‘일의 도(道)’라고 말한다면?”
돈 들여 애써 마신 술기운이 가시는 듯 좌중이 다소 숙연해진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글씨 쓰는데 서도(書道)가 있고, 차를 마시는데도 다도(茶道)가 있다고 법석이다. 정치하는 데는 이제 다 잊고 말았지만 제왕(帝王)의 도(道)가 있었고, 심지어는 쌈패들에게도 건달도가 있었던 것 낫살 먹은 사람이라면 다 안다.
그런데 기업 경영하는데 아무 도(道)가 없어도 되겠는가? 일하자는데 아무 도(道) 없이 휘뚜루마뚜루 해서 되겠는가? 더구나 천년 가는 기업을 한번 만들어 보자고 모였다는데….
최종현 회장 살아 생전에 ‘SKMS, 이것이 일의 도(道)다’ 그렇게 부른 적은 없었다. 누가 정성 들여 읽어주지도 않은 내 나름의 회장 추도사 써서 회사 홈페이지에 올리면서, 내가 그 이름을 붙였다.
아마도 회장도 이 명명(命名)을 듣고 어디선가 ‘허 교수, You 때문에 느닷없이 내가 도령(道領)이 되었네.’ 하며 빙그레 웃으시지는 않을까?
이런 사연이 있었기에 내 강의록의 부제(副題)를 ‘일의 도(道)’라고 명명하였던 것이었다. 기업은 일을 통하여 이윤을 창조하고, 그 이윤에 의하여 존속과 성장을 도모하는 의사(擬似) 인격체이므로 그 수명이 천년 되도록 오래 가려면, 변하지 않는 원칙, 즉 도(道)에 합치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는 소회를 나타낸 것이었다.
세계적 신용평가회사인 S&P에 의하면 세계기업들의 평균수명은 고작 15년이라고 한다. 만약 당신이 코칭 질문을 통하여 고객으로부터 자신이 막 창업한 기업을 15년이 아니라 ‘천년 가는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대승적(大乘的) 목표’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 다음에 필요한 후속 조치는 어떻게 하면 될까?
기업과 여러 이해관계자(Stakeholders)의 관계를 승-승이 이루어지도록 설계하여, 기업을 머크 사처럼 300년 넘어 천년, 아니 영구히 존속 발전하게 하는 명제라면 야심 찬 창업자가 한번쯤 시도해 볼 만한 가슴 설레는 목표가 아닌가?
(다음회엔 ‘기업관① 떠나야 하는 것이다?’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