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금융투자업계에 종사하는 지인에게 "재벌들은 로또를 사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인생이 역전될까 봐"라는 게 이유란다. 이유는 다르지만 현재 증권사들의 행태를 보면 이 같은 농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굳이 로또를 사지 않아도 자금을 키워줄 든든한 후원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8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 2009년 이후 증권사들의 1억원 이상 고객예탁자산 보유고객은 늘었으나 1억원 미만 보유고객은 감소했다.
일례로 지난달 말 M증권사의 1억원 이상 고객의 자산비중은 57%에서 65%로 8% 늘었으나 3000만원 이상 1억원 미만은 23%에서 20%로 줄었다. 특히 3000만원 미만은 21%에서 16%로 비교적 큰 폭 감소했다.
국내 대형 증권사의 고객 1인당 최고예탁액은 4000억원가량이며 증권사별로 30억원 이상을 맡긴 초우량자산가는 15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증권사들은 현재 이들을 잡기 위해 천상의 서비스를 펼치며 '고액자산가앓이' 중이지만 변동성에 신음하며 몇 푼에 허덕이는 개미투자자들은 속 깊은 곳의 위화감을 억누르며 마른 가슴만 두드릴 뿐이다.
◆"초우량고객님만 믿고 맡겨주세요"
증권사들마다 기준은 다르지만 고객 예탁자산과 잠재 예탁자산에 따라 투자자를 분류한다. 일반적으로 중소형사를 제외한 대형증권사들은 고객 예탁자산 30억원 이상 고객인 VVIP(초우량)자산가, 10억원 이상인 고액자산가, 1억~10억원 미만인 보통자산가, 1억원 이하인 일반(대중)자산가로 고객 등급을 나눈다.
고액자산가에겐 증권사들의 자산 전문관리가 실시된다. 이들에게는 전담 프라이빗뱅커(PB)가 따라붙고 일반자산가는 지점콜센터에서 관리한다. 다만 지점 영업사원들이 일대일 케어를 하는 곳도 있고 고객이 원할 경우 전담PB를 배치하는 증권사도 있다.
이처럼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자산가와 고액자산가의 투자전략에는 차이가 있다. 일반 자산가들은 주식이나 펀드상품 운용 시 자산배분을 원활히 하기 힘들어 개별종목별, 펀드별 투자를 할 수밖에 없는 만큼 주가 등락에 따라 수익이 천차만별이다. 특히나 변동성이 큰 장세에 접어들면 안정적 수익추구는 더욱 어렵게 된다.
이에 반해 1억원 이상 고액자산가들은 증권사 전담PB의 포트폴리오에 따른 체계적 자산배분으로 리스크 헤지(위험회피)가 가능하다. 실제 삼성증권에 따르면 2007년 말과 비교해 펀드에 투자하는 고액자산가는 10% 이상 감소했으나 분산투자 상품을 추구하는 고객은 크게 증가했다.
여기서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일반자산가 소외현상을 야기할 수 있는 증권사들의 고액자산가 마케팅이다. 고액자산가의 중요성을 실감한 증권가의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증권사 연구원들이 일대일 상담에서 고액자산가에게 미리 정보를 전달하는 경우도 있고 절세상담을 통해 탈세를 조장하는 사례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도 분당에 거주하는 30억원 이상 초고액자산가 김씨는 "거래를 트고 지내는 H증권사에서 고액투자와 관련해 먼저 연락이 오는 경우가 다반사"라며 "사실상 업체 입장에선 투자자들이 '갑'인 만큼 열과 성을 다하는 모습이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물어볼 일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말에 증권사에 세무상담을 한 적도 있는데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애널리스트가 상담에 응해 무척 기분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국내 대형증권사의 한 연구원은 "고액자산가 미팅이 갑자기 잡히는 경우가 있는데 세무분야에 전문정보를 가진 연구원이 불려가는 경우가 특히 많다"며 "종목 문의면 차라리 괜찮은데 세금과 관련한 얘기를 꺼내면 범죄를 저지르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고 하소연했다.
◆초우량 고객님을 향한 '충정 가득' 서비스는?
"점잖은 사모님이 유명 남성그룹 멤버를 좋아한다며 사인을 꼭 갖고 싶다고 했습니다. 사생(사생활침해)팬카페까지 가입해 돈을 주고 연예인 집주소를 구하고 사인도 구했습니다. 당연히 싫었지만 연구원도 직급이 있는 직장인인데 회사 이익을 위해 별 수 있나요."
국내 한 대형증권사 연구원의 말이다. 이 연구원의 말처럼 증권사들의 고액자산가 차별화 서비스는 일반자산가의 사고범위를 넘어서고 있다.
최근 강남파이낸스센터에 VVIP관리지점인 'V프리빌리지' 센터를 개장한 한국투자증권은 자산 10억원 이상 고액자산가를 대상으로 컨시어지(안내원·관리인) 서비스를 최근 시작했다.
이 서비스는 개인 비서처럼 법률·세무 자문뿐만 아니라 의료, 여행,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며 국내를 가리지 않고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서비스한다. 의료상담은 휴일 없이 24시간 제공한다.
VVIP센터인 '프리미어블루'를 운영하고 있는 우리투자증권도 예탁자산 10억원 이상 고객들에게 호텔과 레스토랑, 공연, 뷰티와 헬스 등 상품 추천 및 예약대행을 하고 있다.
KDB대우증권 역시 10억원 이상 고액자산가에게 은퇴설계, 증여상속, 절세상담은 물론 프로 골프선수의 골프레슨과 자녀 유학상담서비스도 제공한다. 대우증권은 VVIP 자산관리 전문 점포인 'PB클래스'를 서울과 부산 요충지에 차린 상태다.
삼성증권은 초우량자산가 전문점포인 삼성앤드인베스트먼트를 꾸려 전용상품을 제공하는 등 자산관리 전 부문을 책임지며, 미래에셋증권은 일부 VIP센터에서 초우량고객에게 가문(家門) 자산관리인 패밀리오피스서비스와 기업경영 컨설팅서비스인 오피스서비스를 제공한다.
하나은행과 함께 VIP전담지점을 차린 하나대투증권은 세무법인과 연계해 세무조사 및 조세 불복 대행 서비스까지 서비스하고 있으며 별도 VIP지점이 없는 현대증권은 고액자산가에게 주식을 비롯해 부동산, 절세 관련 컨설팅을 진행 중이다.
◆개미들은 투자설명회도 감지덕지
지난 5일 경기도 김포가 거주지인 한 소액투자자 이씨(47)를 서울 여의도 인근에서 만났다. 이씨는 지난해 말 한 대형증권사 김포지점 PB에게 코스닥업체인 H사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투자하면 손실은 없다는 호언에 근 3년간 모은 보너스 3000만원을 덜컥 투자했다.
그러나 이 업체는 업황 전반에 드리운 악재를 극복하지 못한 채 주가가 반 토막 난 것도 모자라 전 대표이사의 업무상 횡령·배임혐의가 발생해 최근 상장폐지 위기에 몰렸다.
"믿고 투자했는데 정작 아무 하소연도 할 수 없는 게 가장 답답한 일입니다. 하루하루 살기 바빠 증권사 리서치자료를 일일이 챙기지 못하는 저는 당연히 상담을 해준 PB가 계속 종목을 점검해 줄 거라 믿었죠.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PB는 투자 상담을 했을 뿐인데…"
이씨와 유사한 사례는 대부분 포털사이트 주식투자 관련 카페의 게시물에서 쉽게 볼 수 있으며 끝내 증권사를 향한 분노로 끝을 맺는다. 신뢰했는데 결국 방치된 상태였다는 게 이들의 읍소다.
그나마 이런 게시물은 수도권에 한정된 얘기다. 지방에 사는 일반투자자들은 이러한 전담서비스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전담서비스는 고사하고 설명회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밝히는 글도 있다.
실제 대부분의 대형증권사의 투자설명회는 수도권에서 진행되며 지방의 경우는 모기업을 기반지역으로 둔 중소형증권사들이 간간히 설명회를 실시하는 게 고작이다.
이에 대해 한 대형증권사 강남지점장은 "고액자산가 유치가 지점 수익률과 직결되는 게 불편한 진실이라면 진실인 만큼 수익에 치중한 증권사들이 아무래도 수도권, 특히 강남을 위주로 영업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증권사들도 자구책으로 지점 비중을 조절하는 등 VVIP 고객 확보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지만 이렇게 해도 초우량고객을 확보하기는 힘들다"며 "다른 증권사에서 더 나은 서비스로 먼저 치고 나가면 우리는 더한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뻔히 출혈경쟁이 펼쳐질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 명의 초고액자산가가 개인투자자 몇 백 명 이상의 수익을 가져다주는 것을 두말할 나위도 없고 또 초고액자산가를 유치해야 증권사의 입지도 더욱 튼튼해진다는 게 이 지점장의 설명이다.
이 같은 지점장의 설명에 대해 자본시장연구원 한 관계자는 "고액자산가 선점을 위한 경쟁이 치열한 것은 고액자산가들의 입맛이 까다로운 탓도 있지만 기존에 투자지점을 선택한 고액자산가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한 영향도 있다"고 진단했다.
또 이 관계자는 "증권사들이 실제적으로 수익을 추구하려면 잠재 우량고객이 될 수 있는 일반투자자들을 물색하려는 선제적 노력이 필요하다"며 "투자자를 발굴하는 것이 결국 증권사들의 이익이 될 가능성이 커 이익 환원 관점에서 일반투자자에게 접근하는 방법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첨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