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우리는 남편과 아내를 바깥 양반, 안사람으로 호칭한다. 그렇게 부르는 연유는 남편은 주로 바깥에서 경제활동을 하여 가족을 먹여 살리고, 아내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녀를 양육하고 집안일을 하기 때문이리라.
이런 구조는 아주 오랫동안 이 땅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잘 유지되었다. 농사짓던 시절에는 체력이 닿는 한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가 월급쟁이로 일하게 되면서 바깥 양반의 역할이 어느 순간에 없어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바로 정년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평생 동안 사회 활동을 하면서 쌓은 경험과 지혜가 과거만큼 유용하지 않게 되었고, 이로써 남성들의 '쓸모'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사람이 가족으로부터 당하는 소외와 냉대를 잘 보여준다. 부모님과 여동생을 봉양하던 그레고르는 어느 날 벌레로 변해버렸다. 그간 그레고르의 기분을 살피던 가족들은 이때부터 돌변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모습을 더 이상 보지 않으려고 했고, 아버지는 벌레로 변한 아들을 무시하고 급기야는 밟아 죽이려고 했다.
그런 가운데 여동생만이 그레고르의 방을 청소해주고 먹을 것을 갖다 줬다. 그러던 동생마저 점차 변해갔다. 가족들의 냉대 속에 그레고르가 굶어 죽자 가족들은 비로소 더러운 벌레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안도했다. 벌레로 변신한다는 설정 탓에 ‘이건 아닌데’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감이 가는 면도 있다. ‘긴 병 끝에 효자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베이비부머 세대들의 은퇴가 뜨거운 감자로 등장하고 있다. 그들은 산업화의 역군으로 국가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지만, 그간 자신들의 미래를 위한 준비는 제대로 하지 못 한 채 밀려나게 된 게 화근이다. 사회생활을 큰 무리 없이 마무리한 것에 대한 안도감, 철들고 처음 맞이하는 자유로움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편안한 마음으로 가정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그 곳에 있는’ 가정의 모습은 기대와는 전혀 다르다는 걸 발견하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나이 든 주부들 사이에 영식이, 삼식이라는 말이 나돈다. 하루 한끼도 집에서 먹지 않는 사람인 ‘영식이’가 가장 환영받고, 세끼를 집에서 해결해야 하는 ‘삼식이’는 천덕꾸러기라는 뜻을 내포한다. 이 말은 그레고르만큼은 아니지만 ‘쓸모’가 없어진 퇴직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평생 가족들 뒷바라지해온 주부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죽 지겨웠으면 이런 말이 나왔을까 싶다.
은퇴자들 사이에 설거지를 하는 사람은 흔하고, 요리를 배우고 있다는 이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예전엔 아내가 돈을 벌어도 남편이 가사에 참여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남성들도 정년으로 바깥에서의 역할이 없어졌다면, 젊은 맞벌이 부부들처럼 가사를 분담하는 것은 이치에 맞다. 그러나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자라면서 ‘남자는 부엌 출입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들으며 배운 걸 하루아침에 바꾸기가 쉽지 않고, 생각보다는 많은 숙련과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 부엌일을 따라 하기가 여간 성가시지 않다는 것이다.
‘여씨춘추’라는 책에 각주구검이라는 말이 나온다. 중국 초나라 때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 칼을 물에 빠트렸다. 그는 칼이 떨어진 뱃전에 표를 해놓고 배를 세운 뒤 표시가 된 물 속에서 칼을 찾으려고 했다는 고사에서 연유한다. 시세의 변천도 모르고 낡은 생각만을 고집하여 이를 고치지 않는 어리석음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99%, Occupy Kitchen!’ 99%의 남성들이어, 부엌을 점령하라.
우헌기 ACC 파트너스 대표코치 / (전) 청와대 비서실 행정관 / (전) 택산상역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