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필자가 ‘SK아카데미’ 교수 시절의 강의록을 정리하여 ‘천년 가는 기업 만들기’라는 이름으로 웹 상에 올려, 나름 ‘사이버 북’ 형태로 10년 넘어 풍설(風雪)을 견디어 온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내 첫 번째 코칭 관련 저술 ‘잠자는 사자를 깨워라(부제 마중물의 힘)’의 출판기념회에 축하 차 왔던 출판사 ‘비움과 소통’의 김성우 대표가 우스개 삼아 “이제는 등단(登壇)하셨으니, 계속 작품을 써내야 한다”고 하면서, 앞의 사이버 북을 버전 업 하여 ‘코칭과 사장학’이라는 주제로 책을 내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준 것이 빌미가 되었다.
‘천년가는 기업 만들기’ 강의록 속에는SK에서 보낸 필자의 마지막 몇 년, 최종현 회장과 Supex라는 공통언어를 통해 소통하며 지낸 기간의 행복했던 이야기가 적혀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또한 안타까운 일은, 그 기록이 필자의 기억에서도, 또 여러 사람의 뇌리에서도 자꾸만 잊혀져 간다는 것이다.
SK그룹에서는 돌아간 분의 기업가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SKMS(SK경영관리체계)를 새롭게 가꾸어 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 같은 사람의 눈으로 보면, 이와 같이 SKMS를 새롭게 한다는 작업이 본의든 아니든 그 원조(元祖)인 최 회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경영철학의 기본 틀을 알게 모르게 조금씩 바꾸어 나가는 결과가 되는 것이니 이를 어쩌랴.
경영원칙이라고 하는 것도 세태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면 바꿔야겠지만, 만약 일에 도(道)가 있다면 그 도(道)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야 가히 도(道)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최종현 사장학’의 주축이 되는 ‘기업과 구성원의 승-승 정신’과 두뇌활용(Brain Engagement)을 통한 ‘무한추구(無限追求) 정신’은 ‘SKMS/Supex 추구’라는 현대적 표현을 빌렸을 뿐 ‘일의 도(道)’가 지향하는 정신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은 ‘일의 도’를 더 개발하여 그 실천법을 강구하겠다는 작금의 노력이, 만에 하나 오히려 최 회장이 한사코 머리를 흔들고, 구성원들로 하여금 이로부터 탈피하기를 애써 촉구했던, 통상경영법(Conventional Management Method)으로 회귀토록, SKMS를 몰아가고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무협소설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마치 무림의 절세 고수가 남긴 상승무예(上乘武藝)의 비급(秘笈)을 물려받기는 하였으되, 그 무예의 바탕이 되는 상승내공을 깊이 연마하여 익히지 못하고, 자꾸만 새로 개발한 초식(招式)을 첨가하여 실전(實戰)에 활용하기 쉽도록 수정하려다 보니, 그 근간이 되는 내공 부분을 훼손하고도 무엇이 어찌 되었는지를 모르는 것과 흡사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최종현 사장학’ 비급(秘笈)의 진전(眞傳)을 처음 물려받은 그대로 써 남기리라.
최 회장, 생전에 그분의 뜻이 그러했으므로, 이를 경영자가 되려는 모든 젊은이들, 그분이 소중하게 생각하던 후학들을 위해 풀어 엮어 공개하려는 것이다.
연마하고 익혀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은, 이 글을 읽는 도전하는 젊은 경영자, 예비경영자 스스로의 몫이다.
최종현 회장에게 ‘어떤 것이 정말로 당신의 일생 경영활동을 정리하는 기념비적인 성과’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는 선경의 유공 인수, SK의 이동통신사업진출 같은 굵직굵직한 사업적 성취 다 젖혀놓고, 자신이 경영법 SKMS를 만들어 선경/SK의 독자적 기업문화를 만들고, 마침내 이의 결실로, 당신 가시기 전에 ‘Supex 추구 경영’이 ‘돈 버는 실천적 경영법’ 임을 입증한 일을 맨 먼저 꼽을 것으로 확신한다.
항간에 유통되는 경영학 서적은 그 가지 수가 아마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지만, 그러나 잘 살펴보면 모두 ‘경영자’가 배워서 실천해야 할 ‘무엇’인가를 적어놓은 책일 뿐이다.
‘최종현 사장학’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의제(擬制)된 인격체인 ‘기업’을 객관화 하고, 이와 같은 기업이 어떻게 스스로의 시스템을 정비하여, 기업을 구성하는 각급 경영자가 갖는 ‘자연인(自然人)으로서의 유한성(有限性)’을 극복함으로써, 영구히 존속,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를 탐구 기록한 유일무이한 실천경영서라고 생각한다.
그런 뜻에서 관찰하면 아래와 같은 일화(逸話)가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회장님, 후계를 아드님으로 정하신다는 것은 SKMS 정신에 위배되는 것 아닙니까?”
어느 철딱서니 없는(?) 임원 하나가 질문을 던졌을 때였다.
‘내가 오너라서 회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으로서는 경영능력이 자네들보다 우수하므로 회장 역할을 한다’라고 최 회장이 늘 스스럼없이 말해왔었으므로 이런 식의 방자(?)한 질문도 평소라면 용납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당시는 회장 승계 구도 논의가, 예행연습이 아니라 실제 상황으로 심각하게 거론되는 시점이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회장의 입을 바라다보며 하회를 기다렸는데, 갑자기 최 회장이 파안(破顔)하며 웃었다.
“이봐, 이 건(件)은 유(you)들이 좀 봐 줘야 해.”
이 연재를 읽는 독자는 곧 알게 되겠지만, 이 장면은 ‘현실을 인식한 경영’이라는 경영원칙에 입각하여, 자연인(自然人) 최종현이 ‘의제된 인격체-기업’에게 한시적(限時的) 유예를 구하는 흥미로운 장면이다.
오늘 아침 읽은 ‘프란츠 메트칼프’의 한 줄 메모, ‘높은 자리에 오르는 일에 대해 성현들은 어떻게 할까?’ 이 글이, 우리가 그때 다루던 ‘일의 도(道)’, 그 철학과 일맥상통하여 아래에 가져다 붙인다.
‘성현들은 출세를 하려고 어떤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지도자로서 추앙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출세에 대해 무관심했지만, 그 대신 자기 일을 탁월하게 해내는 일에 모든 관심을 기울였다. 높은 자리가 훌륭히 일하는 데서 오는 행복한 부가효과라면 받아들이라. 당신이 높은 자리에 오르면 오를수록 당신 안에 있는 지혜를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
(다음 회는 ‘천년가는 기업’ 그 첫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