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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두산, 정전으로 조기퇴근 했던 그날

박지영 기자 기자  2012.02.20 09:2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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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낙타를 끌고 사막을 건너던 나그네가 텐트를 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상한 소리에 눈을 떠 보니 밖에 있던 낙타가 추위를 피해 텐트 안으로 코를 들이민 것이었다. ‘코쯤이야 괜찮겠지’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이번엔 낙타의 머리가 텐트 안에 들어왔다. ‘오죽 추우면 그럴까’하고 이번에도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위에 눌린 듯 무거운 것에 짓눌려 잠에서 깨보니, 이게 웬일 낙타의 큰 몸이 통째로 텐트 안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나그네는 어쩔 수 없이 텐트 밖으로 밀려나와 추위에 떨며 밤을 새워야만 했다. 이 이야기는 ‘낙타의 코를 조심하라’는 중동 우화다. 사소한 듯해서 방심했다가 나중에 큰 화를 겪게 된다는 교훈이다.

   
지난 15일 오후 5시40분 두산타워가 정전되자 사람들이 부랴부랴 빠져나오고 있다(좌). 두산타워 1층 여성의류 판매하는 곳, 정전이 되자 사람들 발길이 뚝 끊겼다.
며칠 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재계서 벌어졌다. 지난 15일 오후 4시3분께, 우리나라 재계서열 10위인 두산그룹에 정전이 일어났다. 지하 7층, 지상 33층 규모의 두산타워가 ‘팟’ 소리와 함께 ‘암흑천지’로 변한 건 삽시간의 일이었다.

1~2분 후 형광등이 깜박깜박 거리며 다시 들어오는 듯 했지만 이내 ‘피쉬’하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전력까지 꺼지고 말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동부하전환기(ALTS, 비상전력 자동전환장치)와 기중부하개폐기(LBS) 사이에 있는 케이블헤드가 문제였다고 한다.
 
14층 기자실에 있던 필자도, 두산그룹 홍보팀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1999년 개점 이래 이처럼 정전사태가 벌어진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는 게 두산 측 전언이다.

놀란 마음에 기자실로 뛰어온 홍보팀 A씨는 ‘쓰던 기사가 날아가진 않았나’부터 확인했다. ‘괜찮다’고 하자 A씨는 “그나마 다행”이라며 “(홍보실) 부사장님은 쓰고 있던 문서가 다 날아가서 울상”이라고 말했다.
       
한번 나간 전력은 좀처럼 되돌아오지 않았다. 전등은 물론이고 인터넷, 엘리베이터 등 되는 게 없었다. 한마디로 손발이 묶여버린 상황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아무래도 더 이상 일하기는 무리일 듯해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나왔다. 그나마 복도엔 비상등이 켜져 있었다.

문득, 쇼핑몰 두타 상황이 궁금했다. 비상구를 통해 14층에서 1층까지 내려갔다. 원형계단을 따라가다 보니 다리는 후들거렸다. 비단 필자뿐 아니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같이 내려왔던 두산 직원들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전력이 나가자 조기퇴근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두산그룹은 이날 오후 8시20분이 되어서야 정상적으로 전력이 들어왔다고 함.)
   
이 모습을 지켜보자니 지난해 9월15일 대규모 정전사태 때가 생각났다. 전국적으로 40여분간 정전사태가 지속됐던 그때 재계서열 1위인 삼성그룹만 단 1초 정전됐다고 한다. 당시 삼성은 곧바로 무정전시스템(UPS)를 가동, 자체 발전해 정전 피해를 비켜갔다고.  
  
사자성어 중 ‘석지실장(惜指失掌)’이란 말이 있다. ‘손가락을 아끼려다 손바닥마저 잃는다’는 뜻으로, 처음부터 야무지게 대비해야 탈이 없다는 의미다.

   
산업부 박지영 기자.
하지만 이미 ‘물(정전)’은 엎어진 후다. 지금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란 속담을 되새겨야 할 때다. 이 속담은 일이 이미 잘못된 뒤에는 손을 써도 소용이 없음을 비꼬는 말이기도 하지만, 어쩌다 실수를 했어도 즉시 고치면 괜찮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 번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소를 잃고도 외양간마저 고치지 않았다면 비판여론은 지금보다 훨씬 거셀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