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Z EZViwe

[독자칼럼] 청춘을 예찬하며

오정근 코치 기자  2012.02.15 11:15:14

기사프린트

[프라임경제] 말이 입춘이지 겨울 한복판이었다. ‘입춘’은 봄의 전령이다. 절기상 입춘은 조금 더 참고 기다리라는 희망의 노래와도 같다. 입춘에는 늘 ‘입춘대길’ 이란 사자성어가 따라다닌다. 24절기 가운데 유독 입춘에만 사자성어가 붙어있다. 한 때 문화마케팅의 일환으로, 중문학자이신 고(故) 허세욱 교수에게 부탁하여 나머지 절기에도 각기 사자성어를 만들어 보급했던 기억이 새롭다.

여전히 ‘입춘대길’만 유독 회자되는 것을 보면 입춘의 지위는 확고하다. 하얀 한지 위에 쓰여진 ‘입춘대길’ 네 글자에서도 기운을 느낀다. 말 그대로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 학창시절에도 설레임과 새로움은 언제나 봄에 시작되었다.

문득 민태원님의 <청춘예찬>을 다시 들어다 본다. 아직도 그 명구들이 입에 맴돈다. 좋은 질문을 찾으려는 코치로서의 본능 때문인지 성찰질문이 먼저 가슴에 와 닿는다. ‘석가는 무엇을 위하여 설산에서 고행을 하였으며, 예수는 무엇을 위하여 광야에서 방황하였으며, 공자는 무엇을 위하여 천하를 철환하였는가?’ 작가는 내게 묻는다.

지내온 반세기 동안 내가 고생을 했다면 그건 무엇 때문이었나? 잠시 되짚어 본다.

그들이 고행과 방황과 철환을 한 이유는 우리에게 ‘밝은 길을 찾아주며, 행복스럽고 평화스러운 곳으로 인도하겠다는 커다란 이상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작가의 말에 고개가 끄덕인다. 그 덕을 누린다. 깊은 감사를 느낀다. 부모님 역시 우리 자식을 위해 얼마나 고행과 방황을 겪었을지 되새기며 감사를 헤아려본다.

작가는 ‘이상(理想)! 빛나는 귀중한 이상, 그것은 청춘이 누리는 바 특권이다’고 했다. 나는 어떤 이상을 가슴에 품고 있나? 나는 청춘이라 말할만한 이상이 있던가? 내 지난 날을 곱씹어본다. 나는 ‘빛나고 귀중한 이상’ 앞에서 작아진다. 쉽고 안락한 길만 골라 지나온 안일함에 부끄럽다.

<청춘(youth)>이란 시를 통해 사무엘 울만은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시기를 칭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고 정의했다. 청춘다운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다. 그는 ‘나이를 먹는다고 늙는 것은 아니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고 일침을 가했다. 여태 나는 ‘정신적 자유로움과 주변에 도움주기’를 소중하게 생각해왔다. 크고 작은 역경이 있더라도 내 삶의 의미 안에 ‘소중한 이상’을 담기로 마음 먹는다.

나는 코칭을 통해 대학생들과 자주 만난다. 아파하는 20대 청춘에게 때론 위로를, 때론 올바른 방향을 찾도록 코칭을 해왔다.

   
 
나는 이제 그들이 ‘빛나는 귀중한 이상’을 가진 청춘이 되도록 돕고 싶다. 도울 수 있다. 이 희망을 글로 쓰자 내 이상이 꿈틀댄다. 청춘이 느껴진다. 청춘을 돕는 일이 내 이상이요 기쁨이다. ‘인간의 동산에는 사람의 풀이 돋고, 이상의 꽃이 피고, 희망의 놀이 뜨고, 열락(悅樂)의 새가 운다.’

오정근 한국코치협회인증 전문코치 / 기업체 전문강사 / 심리상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