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엽 기자, 전지현 기자 기자 2012.01.26 10:29:37
[프라임경제] ‘최초(最初)’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현상계에서는 가히 절대적이다. 가장 처음으로 어떠한 일과 업적을 쌓았다는 것은 국가와 단체, 기업, 개인 등에게 영광스러운 일이자 영원한 ‘NO 1’의 의미도 함께 지니기 때문이다.
개인에게도 ‘첫 사랑’, ‘첫 키스’와 같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의 한 장면도 바로 최초라는 단어에 녹아 있다. ‘최초’라는 타이틀은 누가 가지고 싶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내포된 수 많은 곡절과 사연이 담겨져 있어 우리에게 더욱 오랫동안 사랑받는다. 국가는 물론 기업들도 이런 '최초'를 활용한 다양한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특히 기업에 있어 최초는 역사이자 미래 저력이다. 하지만 해당 업종 시장에 경쟁자가 많다면 '최초'라는 타이틀은 떨치기 힘든 유혹이다.
최근 국내 굴지의 기업이 ‘최초’라는 타이틀을 너무나 손쉽게 얻으려고 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최초 서양식 호텔, 1902년 건립 ‘손탁호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은 현재 정동에 소재한 이화여고 자리에 위치했었다. 사진=서울시
문제의 기업은 국내 호텔업계 선두권을 달리고 있는 조선호텔. 지난 1월11일 조선호텔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 100년’이라는 머리말과 함께 ‘조선호텔 개관 100주년 D-1000행사’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내용의 핵심은 조선호텔이 오는 2014년 10월10일 100주년을 맞아 ‘D-1000’ 카운트다운 시계탑 제막식을 갖는다는 내용이다.
이날은 각계 다양한 인사들과 함께 시계탑 제막을 통해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조선호텔 100주년이 뫼비우스의 띠를 디자인 한 시계탑을 세워 조선호텔의 시간은 100년을 넘어 영원히 나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의문을 제기해 본다. 대한민국 수많은 호텔리어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과연 조선호텔이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이다. 역사적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를 입증할 첫 번째 사료를 살펴보자. 서울시에서 발간한 ‘서울육백년사’를 보면 현재의 조선호텔의 주장은 상당히 왜곡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육백년사’ 시대사 항목 한성부시대 3장, 근대적인 여숙시설(旅宿施設)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근대적 여숙의 발달과 함께 외국인(특히 서양인) 상대의 호텔도 생기게 되었는데 서울에 있어서 최초의 호텔은 1902년의 손탁호텔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은 1888년에 인천에 세워진 대불(大佛)호텔이다.”
두 번째 사료는 1934년 조선총독부 경성부에서 편찬한 ‘경성부사(京城府史)’ 제1권으로 “서울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양식호텔은 1902년에 독일 여인 손탁이 정동에 세운 손탁호텔을 들 수 있다. 이 건물을 세운 미쓰 손탁(Miss Sontag)은 당시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W ber)의 처형으로 1885년 10월 웨베르가 공사로 부임할 때 같이 서울에 왔다.…(중략)”라고 적시돼 있다.
세 번째 사료는 손탁호텔에 세워졌던 장소인 현재의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편찬한 ‘이화 90년사’에서 “손탁은 1895년에 고종으로부터 경운궁(慶運宮)에서 도로 하나 건너편에 있는 서쪽의 땅과 집을 하사 받았다. … (중략) … 그러다가 1902년 10월에는 옛집을 헐고 그 자리에 양관(洋館)을 지어 호텔로 경영하였는데 윗층에는 귀인들의 객실로 사용하였고 아랫층은 보통 객실과 식당으로 사용하였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네 번째 사료는 국내 대부분 호텔관련 전공자들이 손쉽게 접했던 2003년(원융희, 정용해 공저)에 편찬된 ‘최신 호텔학의 이해’라는 책에서도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위 책 제3장 호텔의 역사 중 3절에 해당하는 ‘한국의 호텔역사’에서 “1899년에 인천과 노량진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자 외국인들은 굳이 인천에만 숙박할 필요가 없어졌고, 따라서 인천의 숙박 산업은 더 이상의 큰 발전이 없었다. 그후 서울에서는 1902년에 독일여인 손탁이 손탁호텔을 건립하였다. … (중략) … 이 호텔에는 객실, 식당, 연회장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서 당시 외교 모임인 정동구락부가 이 호텔에서 개최되었고, 기자 시절의 처칠 수상이 숙박하는 등 널리 명성을 떨쳤다”라고 적혀 있다.
오히려 가장 최근 저술된 호텔관련 학과 교육서에는 조선호텔 관련 대목은 “일제 말에 총독부와 개인이 운영했던 철도, 열차식당, 역구내식당, 조선호텔, 반도호텔, 부산철도호텔들은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서 관리하다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의해 교통부로 이관되었다”라는 것이 간략히 밝히 조선호텔의 모습이다.
위 대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현재의 조선호텔의 설립 당시 모습은 명성황후를 암살하고 한민족 백성을 35년간 강제 점령한 일본제국주의 모습이 나온다.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만 현재의 조선호텔은 사실 그리 자랑스럽지 못한 과거와 위치에 존재해 있다.
◆침략의 상징 ‘조선호테루’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의 칼날에 암살당한 뒤, 1897년 고종황제는 조선을 황제국인 대한제국으로 격상시키면서 중국의 황제만 하늘의 제사를 지낼 수 있었던 보이지 않는 묵약을 깨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할 때 천신지지(天神地祗)와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에게 고제(告祭)하기 위해 환구단을 만들었다.
열강에 의해 국권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내린 고종의 결단의 상징이자 외세로 부터 자주와 독립의 상징으로 만든 첫 사업이 바로 환구단이다.
하지만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효과적인 침략과 수탈의 목적으로 팔도에 철도를 부설하게 되고 침략 일본인과 그에 부화뇌동한 친일파들이 묵게 될 숙박시설의 필요성이 늘어나게 됐다.
1911년 2월부터 환구단의 건물과 터는 조선 총독부가 관리했지만 1913년 환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건평 580여평의 일본식 명칭 ‘조선호테루’가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결국, 조선총독부 직할 조선철도국에 의해 1913년 4월에 기공해 1914년 9월30일 준공, 10월10일에 개관한 지하 1층 지상 3층의 벽돌건물이 바로 조선호텔이 자랑하는 100년 역사의 시작이다.
이러한 조선호텔의 지난 100년 역사에 대해서는 총독부를 거쳐 미군정, 이승만 정부 이후 민간으로 넘어가는 과정과 함께 급성장한 배경 등에 대해서는 따로 살피겠다.
좌측: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의 근대화 의지가 담긴 환구단의 원래 모습, 우측: 조선총독부에서 강제 훼손 후 호텔이 들어선 뒤 모습. 좌측 상단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황궁우
◆한국기네스協, 인증서 남발로 해체
“웨스틴 조선호텔이 지난 10일 개관 82돌을 맞았다. 우리나라 호텔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호텔은 10일을 기해 한국기네스협회로 부터 ‘한국 最古(최고)의 호텔’로 기네스북에 오르는 인정을 받은 기쁨도 함께 누렸다.”(1996년 10월12일, 매일경제)
위 기사와 같이 지난 1996년 조선호텔은 한국기네스협회를 통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이라는 기록을 받았다. 이 부분이 바로 이번 100주년을 앞둔 시계탑 제막식의 핵심 근거가 된다.
여기에서 한국기네스협회는 영국에 소재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기네스북과 과거에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되어 있던 곳으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호텔이 한국기네스협회에서 인증 받은 ‘최고’의 호텔이지 ‘최초’의 호텔은 아니라는 점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호텔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호텔역사에서 조선호텔이 가질 수 있는 위상은 높다. 하지만 굳이 외부 기관의 협조(?)를 통해 ‘최고’를 ‘최초’로 둔갑시킬 수는 없는 일.
아울러, 한국기네스협회는 지난 2001년 ‘인증서 남발'을 이유로 해산된 뒤 국내에는 공식 대행사가 없으며 사설기업인 ’한국기록원‘이 자치단체와 기업, 개인을 대행해 기네스북 등재를 대행하고 있다.
과거 한국기네스협회는 의뢰자가 제공하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수수료를 받고 국내 한국기네스를 운영한 바 있는데, 결국 인증서 남발이라는 무리수로 인해 해산됐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기록원은 본지의 조선호텔이 최초의 호텔인가에 대한 질의에 대해 “내용을 검토한 결과 현재 기록 DB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록으로 확인되었으며, 과거 한국기네스의 기록은 여러 가지 문제 발생과 오해의 소지로 인해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혀 왔다.
한편, 조선호텔 홍보실 측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호텔에서 배포한 보도자료가 회사 공식 입장이며, 질의한 내용에 대해서는 알아보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비록 어두운 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밝은 미래를 지향한다면 지난 과거에 사회 구성원들이 이해한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굳이 사실(史實)이 아닌 것을 사실(事實)로 왜곡한다는 것은 그 일에 종사하는 수 많은 사람들의 질타를 자초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지나침은 아니함 보다 못한 법이다.
◆신세계 오너家, 지분 통해 조선호텔 장악
조선호텔이 국내 최초 근대식 호텔이라며 100주년 기념 시계탑 제막식을 가졌다.
한편, 현재 웨스틴조선호텔의 최대주주는 총 98.78%의 지분율을 소유한 이마트다. 전자공시에 따르면, 이마트는 경영 참여를 목적으로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Westin Hotel Company’는 경영지원 계약 체결로 매출액의 일정비율을 마케팅 및 경영수수료로 지급하고 있다.
웨스틴조선호텔의 지배구조를 살펴보면 신세계 오너일가의 지배력이 막강하게 형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막내딸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은 현재 웨스틴조선호텔의 1.09%를 보유함에 따라 2대 주주로 등재 돼 있다.
단순한 수치로는 낮은 비율이지만 조선호텔의 최대 주주인 이마트의 1, 2, 3대 주주가 오너가 이명희 회장과 아들인 정용진 부회장, 딸인 정유경 부사장(총 27.14%)이라는 점에서 오너가 지분만으로도 신세계 그룹전체를 거머쥐는 구도인 셈이다.
지난 91년 삼성그룹으로부터 분리한 범 삼성가인 신세계는 지난해 5월 이마트를 법인으로 신설함으로써 백화점 부분인 신세계, 대형마트 부분인 이마트로 분리되는 수순을 밟았다.
이 과정에서 기존 신세계가 보유했던 1530만6234주를 신설법인인 이마트에 모두 이관했다. 재계일각에서는 정용진 부회장과 정유경 부사장에게 단계적으로 경영권을 대물림하기 위한 수순이 아니냐는 관측이 우세하다.
아울러 지난 2010년 호텔의 베이커리사업부문을 분할, 계열회사로 등재된 조선호텔 베이커리는 현재 조선호텔이 총 90만주로 45%를, 정유경 사장이 80만주로 40%로 1, 2대 주주를 나란히 유지하고 있다.
경영 전면에 나서지 않고 ‘경영의 조언자’로서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정재은 신세계 명예회장(이명희 회장 남편)은 신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선호텔의 명예회장직을 유지하며 경영에 직접적인 참여는 안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사실상 1996년 1월 조선호텔 명예회장에 취임하면서 현역 경영인 생활을 마감했다.
지난해 말 인사이동을 통해 최대 경쟁사인 신라호텔의 성영목 전 대표이사를 영입했다. 1979년 신세계백화점에 입사한 성영목 대표는 1985년 삼성그룹 비서실로 파견되는 등 삼성증권 경영기획팀장(1992)으로 활약하다 1997년에는 삼성물산 유통부문과 호텔신라에서 유통전문가로 일했다.
이어 2002년 호텔신라 면세유통사업을 총괄해오다 2007년 호텔신라 대표직을 맡았다.
이외에도 허인철 현 신세계그룹 경영전략 실장 사장이 웨스틴 조선호텔 감사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