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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기의 책보기] 님웨일즈의 ‘아리랑’

프라임경제 기자  2011.09.16 17:3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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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30년 전에 통과의례로 읽었던 책이다. 32살의 김산(1905-1938? 본명 장지학?)을 마오쩌뚱 관찰기 '중국의 붉은 별'을 쓴 애드가 스노우의 아내 '님 웨일즈'가 인터뷰 후에 쓴 관찰기다. 김산은 완벽한 공산주의자다. 그는 동양의 체게바라였다.

   
 
조선 독립을 넘어 중국, 일본까지를 아우르는 범 아시아 혁명 정부를 위해 투신했던, 요즘 말로 글로벌 공산당원이었다.

마오쩌뚱이 대장정 후 연안에서 재기를 다질 때 한국인으로는 김산과 군정대학에 다니는 젊은 학생 李가 있었고, 나중에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던 무정(武亭)이 팽덕회의 참모장으로 있을 뿐이었다고 진술한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공산당원이었는가 짐작이 가능하다.

다른 역사책에 의하면 그는 중국 마오쩌뚱 시대 4인방으로 날렸던 캉성(康生)이 연안에서 일본의 스파이로 몰아 그를 처형했으나, 마오쩌뚱 사망 후 김산은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복권됐고, 캉성은 제명됐다. 님웨일즈와의 인터뷰도 조국의 현실을 서방에 알리기 위해 응했으며, 조직의 보호를 위해 출판을 미뤄달라는 그의 부탁으로 1941년에 출판됐다.

이제 32세, 대단한 국제 공산당원 김산의 이야기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마르크스가 러시아 박물관에 박제돼버린 지금에야 김산을 본 받아서 열혈 공산당원이 되라며 이 책보기를 권한다면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결론은 자식을 큰 인물로 만들고 싶거든 김산이나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힐러리나 오프라 윈프리처럼 키우라는 것이다.역사에 가정은 공허하지만 캉성의 견제(?)가 없었더라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에 한국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김산이 한 자리 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겨우 열한 살 밖에 안된 어린 나이에 집을 나와 혼자 힘으로 살아왔다. 주린 배 옆구리에 3개 국어 사전을 끌어 안고 일본, 만주, 중국을 떠돌아 다니던 초라하나 열정적인 학생이었다"
 
11살,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 때다. 그가 비폭력 삼일 만세운동의 처참한 실패를 경험한 후 '국제과부, 조국을 원망하며 울음소리가 함성으로 바뀔 때까지 돌아오지 않겠다'며   일본으로 떠났을 때 역시 14살, 중학교 2학년 나이였다.

큰 바다에서 큰 고기 난다고 큰 인물들은 반드시 남보다 이른 나이에 큰 뜻을 품게 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고난에도 일로정진하는 그런 게 있다는 것을 요즈음의 중 2학년, 온실의 화초처럼 보살핌에 익숙한 그런 아이들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중학생뿐이랴. 어른으로 사는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겨우 15살에 무일푼으로 일본을 떠나 하얼빈에 내려서 남만주에 있는 민족주의 계열의 군사학교로 가기 위한 700리, 30일 간의 대장정은 40대 후반의 어른인 필자가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 정도로 대견, 대담하다. 굳이 광동 코뮨, 해륙풍 소비에트에서 보낸 열혈 20대, 일본 순사에게 국내로 잡혀와 감옥에서 겪는 고난과 신념에 찬 저항, 옥고로 병드는 것까지 언급하는 것은 사족이다.

다만 32살에 불과한 젊은이가 낯선 서양인에게 '영어'로 풀어 놓는 자신의 지난 20년 경험과 생각들인데 그 지식과 사유, 신념의 깊음, 광활함, 결연함, 애국심, 동족에 대한 애정과 연민 앞에서는 페이지 페이지마다 숙연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항상 그렇듯이 패배의 결정적 원인은 적전 분열, 좌절이다. 아리랑을 읽으면 1920, 30년 대 해방 전 동아시아 정세와 독립운동의 지형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지도자들이 어떻게 했어야 분단국가로 남지 않았을지의 역사적 교훈도 충분하다.

지금도 개인의 영달만이 아닌 대한민국과 역사를 걱정하고, 그것을 위해 자신을 조금이라도 희생시키는 길을 걷겠다거나, 걷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에 한 번 정도 '아리랑'을 꺼내서 거울에 자신을 비추듯이 읽어 볼 일이다.

열강이 경쟁적으로 할퀴었던 20세기 초 아시아. 국제과부 조선의 똑똑한 아들 김산이 영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독일 조계를 들락거리며 보여주는 개화 당시의 상하이와 만주 심양의 풍경, 혁명가의 애절한 사랑도 읽을 만 하다. ‘아리랑’의 마지막 구절, 김산의 발언이다. 
 
"한 사람의 이름이나 짧은 꿈은 그 뼈와 함께 묻힐 지도 모른다. 그러나 힘의 마지막 저울 속에서는 그가 이루었거나 실패한 것이 단 한가지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그의 개인적 결정이라고는 전진할 것인가, 후퇴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굴복할 것인가, 가치를 창조할 것인가, 파괴할 것인가, 강해질 것인가, 나약해질 것인가 하는 것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김산'으로부터 40년 후, 지금으로부터 불과 30년 전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하늘을 나는 새들이 자유롭기 위해서 오늘도 역사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자신을 희생시키는 '김산'을 요구하는가 보다.

"1980년 '서울의 봄'을 탱크와 군홧발로 무참히 짓밟고,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권력을 장악한 그는 잠시 후 나를
   
 
어떤 방으로 끌고 가 쇠파이프에 손과 발을 묶어 통닭처럼 매달았다. 내 입에 수건을 얹고 주전자로 물을 부었다. 숨이 막혀 몸부림치다가 저녁에 먹은 모든 음식물과 한 방울의 물까지 토해내고 나서야 그 말뜻을 이해했다.

일명 '통닭구이'라는 이 고문은 당시 가장 일반적인 고문의 형태로 끌려간 학생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나는 이 고문을 여러 차례 당했고, 몽둥이에 맞아 사지가 축 늘어져 있었으며, 눈이 가린 체 지하실에서 '자진 월북하다 휴전선에서 총에 맞아 죽은 대학생'으로 둔갑시키겠다며 M16소총 안전장치를 푸는 철커덕 소리의 공포에 온 몸을 떨어야 했다.(내 안의 전쟁과 평화 中)"

컬럼니스트 최보기 thebex@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