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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저축은행 ‘동안미녀’가 제격

임혜현 기자 기자  2011.06.09 14:4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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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시작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했다. “제 아무리 동경대를 나왔다고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겠죠”라는 장미리(이다해 분)의 푸념(‘만일 그런 정도라 하더라도’ 어렵다는 뜻)을 장명훈(김승우분)이 “아, 동경대 출신인가요?”라고 ‘진담으로 받으면서’ 일은 시작됐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결국 자기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어 버려 현실과 다른 환상 속에 갇히게 되는 인격장애인 리플리 증후군을 다루는 문화방송 ‘미스 리플리’ 이야기다.

드라마는 얼떨결에 일이 커졌다고 정리하기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거짓말을, 그것도 열심히 하고 있는 장미리의 충격적인 행동들을 따라가고 있다. 왜 그녀가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드라마 중에 어느 정도 설명이 돼 있다. 해외에 입양되었지만 잘못돼 인생이 고달프고,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심지어 거짓말을 해서라도 공감을 이끌어 내고 감동을 주는 그녀의 기술(방황하는 일본 총리 딸을 ‘나도 동성애자’ 거짓말로 다독이는 에피소드)이 ‘어쨌든 착한 일’에 쓰이기도 하면서, 시청자들의 심경을 더욱 복잡하게 하고 있다.
 
연민을 강하게 느끼면서 장미리에게 공감하는 강도가 강할수록 한국사회에서 사는 일이 신산하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성공 사다리를 오르는 게임이 ‘불공평하고 폐쇄적인 구조’이거나 그렇게 바뀌어 가고 있다고 느낄 가능성, 또 반칙을 해서라도 결과가 좋으면 된다는 요령을 체득한 사람이 이 드라마의 주인공에 공명할 확률도 높아 보인다.

좀 더 부연하자면, 이런 시청자들은 ‘미스 리플리’와 같은 요일, 같은 시간대에 똑 같은 ‘거짓말’이라는 소재를 다루며 전파를 타고 있는 한국방송 ‘동안미녀’에는 공감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

생계를 위해 거짓말을 하지만 그 과오를 털어내고, 때마침 자기 능력이 부각될 기회(디자인 공모)가 외부 사정(디자인회사 내부의 아웃도어 브랜드 론칭 관련 알력)으로 생기는 과정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보여주고 있는 이 ‘사필귀정’ 드라마는, 과거 인기를 끌었던 ‘명랑소녀 성공기’를 닮았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만화 같다’는 불만을 살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 세번째 ‘거짓말’ 드라마가 한국 사회에 선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 이강래의원이 “정책실패, 감독의 실패, 대주주를 비롯한 경영진의 불법·탈법, 저축은행의 수명 연장 로비 등이 뒤섞인 것”(7일 대정부질문)이라고 ‘시놉시스’를 요약해 준 바 있는 ‘저축은행 사태’가 그것이다.
 
그러면 ‘미스 리플리’의 장미리를 연민하는 이들에게 ‘저축은행 사태’라는 드라마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그 놈이 그 놈”, “모두 도둑놈이야”이라는 냉소를 깔고 보면, 물방울 다이아몬드나 골프장 로비도, 우량저축은행 징표인 88클럽의 퇴출을 막고 혹은 더 많은 이익을 올리기 위해 동분서주한 저축은행들의 행보는 정히 이해못할 바도 아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또 이미 발생한 금융기관의 손실이 컸으며, 사태의 등장인물이 많고 부정하게 오간 뒷돈이 많고 경로도 복잡하다는 점 등등이 이 드라마를 ‘동안미녀’ 같은 단순명쾌한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라기보다는 복잡한 ‘미스 리플리’의 ‘한 핏줄’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당연히 주인공들은 살려고 발버둥을 친 죄밖에 없거나, 관행대로 좀 봐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결국 사고가 터져 구설수에 올랐을 뿐이라는 등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르겠다는 모두가 피해자인 상황으로까지 해석할 여지도 있다.
 
하지만 당사자가 됐든 지켜보는 이가 됐든 간에, ‘지저분한 상황’에 공감을 하거나 연민을 하는 데에도, 또 ‘정상을 참작(情狀參酌)’해 달라고 주장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고, 지켜야 할 선이 있다. 또 실상 복잡할 것도 없다. 나쁜 일이 많이 겹쳐 있기는 한데, 그래도 절대로 그러면 안 되는 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어떻게 해도 합리화는 안 된다는 전제가 서 있다.
 
애초, 1970년대에 사채시장을 동결하고 이를 양성화하면서 저축은행이 등장했다(과거의 상호신용금고). 1990년 무렵에는 200개를 웃돌았다고도 한다. 이것이 IMF 구제금융을 거치면서 대거 문을 닫고, 이후 살아남은 이들끼리 서로 M&A를 하면서 2010년말 현재 국내 저축은행의 개수는 총 105개로 정리됐다.

그런 복잡한 사정을 거쳐 살아남은 저축은행들이, 관리 실패나 세계 경제 여건 악화 등을 겪는다고 100% 모두 대주주 불법이나 로비 전쟁으로 달려갈 정도로 모두 취약하거나, 경영 마인드가 뿌리부터 썩어 있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렇게 이번 비리들을 합리화한다면, 그건 저축은행업계 전체에 대한 모욕이다.
 
더욱이 저축은행에 예금을 하거나 투자를 한 이들 중 많은 이가 서민이고, 이들은 ‘정보의 비대칭’으로 이 같은 상황에 손해 보는 선택을 했다는 점에 비춰보면, 이번 일은 특정 집단에서 제로섬 게임을 벌이고 폭탄을 돌리다 끝난 ‘그들만의 리그’도 아니다. 저축은행은 금융회사로 일반 기업보다 높은 수준의 도덕성이 요구된다는 점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그러니, ‘미스 리플리’에 열광하는 시청자들이 많고 세상사 중엔 그런 세계관으로밖에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적지 않다고 해도, 적어도 저축은행 사태를 바라볼 때만이라도 그런 시각을 들이대고 “원래 다 그렇다”는 결론을 내는 일에 잠시 신중할 필요가 있다. 
 
‘저축은행 사태’야말로 (해법을 드라마 각색에 비유한다면) 잘못을 고백하고 책임을 질 부분은 모두 지고, 다른 기회가 허락된다면 떳떳하게 그 기회를 잡는 ‘동안미녀’ 같은 ‘만화 같은 구성’이 적합하다. 그런 동안(그냥 어려보이는 얼굴이 아니라 ‘맑아서’ 어려 보이는)을 가진 저축은행들과 그런 저축은행들의 회생을 돕기 위해 분주한 당국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