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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신화’ 이랜드…처음엔 이대앞 2평 보세옷가게

[대기업 해부] 이랜드…① 성장과 태동

전지현 기자 기자  2011.06.07 16:2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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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국내 대기업들은 대내외 경제 상황과 경영 방향에 따라 성장을 거듭하거나 반대로 몰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기업일지라도 변화의 바람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2, 3류 기업으로 주저앉기 십상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선택’과 ‘집중’을 요구받고 있다. 국내 산업을 이끌고 있는 주요 대기업들의 ‘선택’과 ‘집중’을 조명하는 특별기획 ‘대기업해부’ 이번 회에는 이랜드를 조명한다. 이랜드의 태동과 성장, 계열사 지분구조와 후계구도 등을 두 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1980년 9월23일 이화여대 광생약국 앞 작은 보세 옷가게 ‘잉글랜드’가 문을 열었다. 자그마한 이 가게가 훗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패션유통기업이 되리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지금의 30~40대면 누구나 한번이라도 입어본 패션 브랜드 ‘이랜드’. 1983년 이후 교복 자율화 조치의 물결로 캐쥬얼 패션에 소비자들의 관심이 모아지던 그때, 고품격 캐주얼 브랜드 이미지에 소득수준에 맞는 가격정책으로 발길을 유혹했던 그 곳. 지난 해 창업 30주년을 맞은 이랜드그룹 이야기다.      

   
 1980년 이랜드 신화의 첫 시작 '잉글랜드' 매장 앞의 창업주
◆‘근육무력증’ 이겨낸 28세 청년의 창업

부자가 되는 게 꿈이던 청년 박성수. 서울대 건축공학과 출신인 박 회장이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갑작스레 ‘근육무력증’이 찾아왔다.

하지만 꿈 많던 청년에겐 병마도 독이 되기보다 약이 됐다. 병마와 사투한 2년여 동안 섭렵한 3000여권의 책들이 훗날 창업의 자양분이 됐으니 말이다.

병을 이겨낸 28세 청년 앞에는 입사연령제한이 놓인다. 그리고 그에게 걸림돌이 됐던 연령제한은 결국 감수성이 풍부하고 그림 그리길 좋아하던 박 회장이 의류 사업에 발을 들여놓게 만드는 계기가된다.

‘눈 있는 사람이 놀라는 가게’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이화여대 앞 2평짜리 ‘잉글랜드’ 옷가는 문을 열자마자 대박이 났다.

이전 무채색 계열과는 전혀 다른 원색의 화려한 색상, 눈에 띄는 커다란 알파벳 문양, 실용적인 캐주얼 디자인 등 감각적인 캐쥬얼 의류를 학생 용돈만으로 살 수 있는 저렴한 가격에 판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청소년과 대학생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는다. 

입 소문을 타자 ‘잉글랜드’ 매장 분점을 내고자하는 고객도 생겼다. 박 회장은 가맹비와 로열티를 받고 회사는 브랜드를 기획하고 디자인에 전념한다면 더욱 좋은 옷을 만들 수 있겠다고 판단, 당시는 생소한 패션 프랜차이즈 개념을 도입한다.

국가명은 상표등록이 안 되는 국내 사정에 따라 1986년 들어 상호도 현재의 이랜드로 바꿨다. 이때부터 그는 보세 의류에서 손을 떼고 직접 디자인한 브랜드 제품을 생산한다.

   
박성수 이랜드 회장
◆중저가 블루오션 개척…‘이랜드 신화’ 탄생

그렇게 ‘잉글런드’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박성수 회장은 1983년 실질적인 첫 브랜드 ‘브랜따노’를 선보인다. 당시 고가와 저가 시장으로 양분됐던 의류시장에 ‘중저가 브랜드 의류’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 소비자의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이어 이듬해인 1985년 언더우드, 1989년 헌트, 리틀브렌 등 브랜드마다 히트를 친다. 특히 헌트는 1993년 월 100억원, 그 해 100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단일브랜드로는 국내 최초 연간 매출 1000억원을 돌파한 패션브랜드에 등극했다. 1986년 법인 설립 첫해 66억원에 불과하던 매출이 연평균 200~300%씩 고공비행 했다.

대리점 확장 추세도 급물살을 탔다. 가맹점 수익을 고려해 상권 중복의 신규 매장 개점을 억제하는 등으로 가맹점을 열기 위해서는 평균 6개월 이상 대기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1986년 90개였던 가맹점수가 93년에는 2000개를 넘어서며 급속히 증가했다. 명동, 종로 등에선 이랜드가 운영하는 매장이 줄지어 늘어선 ‘이랜드 스트리트’가 생겨났고, 심지어 이랜드 매장 옆에 있으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집객효과가 대단했다.

프랜차이즈 후드티를 뜻하는 ‘맨투맨’은 박 회장이 용어를 만들었고, 구김이 안가는 ‘링클프리’ 면바지 역시 이랜드가 최초로 상품화했다. 프랜차이즈 방식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적은 자본으로도 안정적인 판로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어 대기업이 독점하던 시장의 진입장벽을 낮춰 패션산업의 저변이 확대되는 전기를 가져 오는데 기여했다, 

◆사업구조 다변화 …그룹 모습 갖추다

한국경제가 급상승하던 1990년대. 이랜드는 패션전문기업에서 점차 그룹의 면모를 갖춰간다. 1994년 당산동에 ‘2001 아울렛’을 열며 유통업에 진출, 같은 해 이탈리아 정통 피자전문점 ‘피자몰’을 열며 외식사업을 전개한다. 1996년에는 호텔사업에도 뛰어들었다.

국민 소득이 높아질수록 삶의 질과 관련 있는 산업이 발전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의(衣)ㆍ식(食)ㆍ주(住)ㆍ미(美)ㆍ휴(休)로 대표되는 지금의 사업영역도 이 시기에 틀이 짜였다.

무엇보다 패션을 잇는 제2의 성장엔진이 절실했다. 브랜드가 늘면서 생겨난 패션재고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도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박 회장은 국내 백화점 이외 중산층이 이용할만한 유통채널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 2년 여간 TF팀을 꾸려 유통시장 조사에 나서 신개념 유통 사업을 구체화했다. 

1994년 4월 개점한 ‘2001 아울렛’ 당산점은 이랜드의 이런 고민을 단번에 해결했다. ‘백화점을 할인한다’는 슬로건으로 백화점처럼 쾌적하지만 가격은 50~80% 저렴한 유통공간이 소비자와 업계에 큰 반향을 불러왔다. 층별로 상품군을 묶고 밝은 조명과 깔끔한 인테리어, 여기에 식품까지 구입 가능하도록 해 연일 고객들로 북적댔다. 미국의 교외형 아울렛과 달리 국내자동차 보급률을 감안해 선택한 ‘도심형 아울렛’ 전략도 적중했다.

   
 이랜드 그룹 가산 사옥
1994년 28억원을 기록했던 아울렛 매출은 이듬해인 1995년에는 542억원으로 급증했다. 아울렛 사업 출범 5년만인 1999년에는 매출이 3000억원에 육박하며 패션과 더불어 이랜드그룹의 주력사업으로 빠르게 자리매김했다.

이랜드의 해외 진출 시점도 이 무렵이었다. 1994년 국내 시장 생산기지 차원에서 국내 최초로 진출한 중국에서 매년 50% 이상 성장을 거듭하며 지난해 1조200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 목표 매출액은 2조원이다. 특히 이랜드의 철저한 현지화, 시장조사 전략은 중국에 진출한 국내 기업의 롤 모델로 꼽힌다. 중국, 인도 파키스탄 등 해외 글로벌 인프라 구축도 동일한 같은 시기에 추진했다. 해외 소싱 역시 이랜드가 최초다.  

◆위기에서 이랜드 구한 ‘정도 경영’

“외국인 투자가가 1년간 나머지 돈을 투자하지 못하기에 이상해 물어봤더니 막상 기업을 사려고 하면 그 회사의 장부가 두 개랍니다. 사실 우리 회사도 장부가 하나라서 투자했다는 겁니다. 제가 얻은 결론은 하나입니다. 정직하면 손해 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일 때는 정직해야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박성수 회장의 회고다.
 
이랜드의 4대 경영이념 중 하나인 ‘기업은 이익을 내는 과정에서 정직해야 한다’는 뜻을 담은 박 회장의 정도경영의 외길을 여실히 드러내는 말이다. 정도경영은 그의 말과 같이 결정적인 순간에 기적을 불러온다.

1997년 말 IMF가 터지면서 이랜드는 최대 시련을 맞는다. 탄탄한 수익구조를 자랑했지만 금융기관들의 자금 회수는 흑자경영에 있던 이랜드를 코너로 내몰았고, 일시적인 자금 유동성 부족은 급기야 부도 직전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그러던 순간, 국내 투자기업을 물색하던 외국인 투자자로부터 400억원의 거액을 유치한다. 투자자는 사모펀드인 ‘워버그 핀쿠스’.  다른 기업과 달리 이랜드는 이중장부를 갖고 있지 않아서라는 게 그 이유였다.

실사 과정에서 ‘워버그 핀쿠스’로부터 익힌 기업실사에 대한 선진기법은 훗날 이랜드가 보여준  M&A에 밑거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