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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어윤대에 ‘4월 이야기’를 권한다

임혜현 기자 기자  2011.03.31 11:5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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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잠이 많은 내가 동경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을 때, 담임 선생님은 ‘기적’이라고 말했다. 이왕 기적이라고 할 것 같으면 나는 ‘사랑의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었다.(영화 ‘4월 이야기’ 엔딩 독백)”

일본 영화 ‘4월 이야기’는 긴 생머리에 순진무구하게 생긴 마츠 다카코를 내세워 사랑(혹은 짝사랑)의 힘을 보여준 작품이다. 멀리 북해도(훗카이도)의 고교에 다니던 주인공은 한 해 선배가 멀리 동경의 무사시노 대학으로 진학하자 절망에 빠진다.(아마 주인공이 ‘평소 실력’으로 갈 수 있었던 학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열심히 공부한 주인공은 선배를 따라 ‘동경 입성’에 성공해 ‘선배 찾기’에 나서고 헌책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를 찾아내 주변을 맴돌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데 성공한다.

다만, 이 영화에서는 “제가 선배를 따라 이 학교에 왔어요”라는 고백을 보여주지는 않고, “선배, 고등학교 때 유명했잖아요”라며 서로 우연히 안면을 트는 남녀처럼 인사를 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후일을 여백으로 남겨두면서 끝난다. 그래서 길지 않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싱겁다, 속았다는 평이 많은데, 오히려 이 영화의 미덕은 여기에 있다.

처음부터 주인공의 입학식과 고교 시절을 오가며 그녀의 감정 라인에 노출된 관객들은 ‘사랑의 힘으로 입시 신화를 쓴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영화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간다. 입학식만 끝나면 어떻게든 개인 정보를 빼내 당당히 ‘쳐들어갈’ 것 같다는 기대는 그래서 나온다.

그런데 일직선 도로 같던 주인공의 길은 곧 여러 갈래의 샛길이 되어 느리게 흘러간다. 플라잉 낚시 동호회를 들고, 수업을 듣고, 일반적으로 할 일 없는 대학 신입생처럼 별 일 없이 산다. 크게 마음먹은 서점 나들이도 빙빙 돌면서 뜸을 들인다. 그리고 한참 만에야 ‘겨우’ 안면을 튼다.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지만, 반면 상대방에게도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다. 입장을 바꾸어, 갑자기 웬 인물이 나타나 당신 때문에 목표 대학까지 바꿔 따라왔다고 짝사랑을 일방적으로 고백해 온다면, 당황하지 않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런 점을 극히 강조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복잡해 보이는 연애를 단순하게 정리해 진행하길 바라는(혹은 뭔가 실질적으로 연애의 첫머리라도 보고 싶은) 관객의 감정은 끝끝내 충족되지 않는다.

단순하게 보이는 ‘연애 사건’을 복잡하게 풀어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것이 이 영화다. 그래서, 둘이 커플이 되었는지를 당장 확인하지 못한 점은 싱겁기는 하지만 대신에, 아마 ‘잘 연결되었다고 가정하면’ 저 둘은 급격히 달아올랐다 식는 대신 성공적으로 잘 애정의 기초공사를 쌓아나갔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최근 KB금융의 어윤대 회장이 연일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비만증 KB의 대대적 수술 필요성을 취임 일성으로 언급, 파란을 일으켰던 어 회장은, 새 봄을 맞아 어느 자리에서 국내 금융회사들의 경쟁력 문제에 대해서 무게있는 발언을 내놔 주목을 받았다. ‘메가 뱅크론 재점화’ 등 요동치는 금융 시장 재편 국면에서 해당 분야 대학 교수로 전문성을 쌓아온 관록을 펼치기에 새로운 봄만큼 좋은 때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방적인 그의 노래에 버거움을 느끼는 내부 목소리가 없지 않은 듯 하다. KB국민은행 여의도 본사 1층에는 봄부터 “어 회장이 욕심을 내고 있다”는 취지의 대자보가 붙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어 회장을 ‘무면허 운전’에 빗대는 거친 표현이 등장한 것은 그를 노욕 덩어리 정도로 보는 노조의 지나친 평가일 수도 있다. 실제로, 어 회장의 전문성과 많은 노력, 한국 금융지주 관련 문제 전반에 관해 갖고 있는 애정 등을 종합해 보면 이같은 평가는 상당히 박한 것이기는 하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런 부분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어 회장이 아무리 좋은 의도로 전문성과 애정을 갖고 KB에 메스를 들이댄다 해도, 아직 조직 구성원들과의 ‘소통’이 진행되지 않은 터에 진행된 여러 작업이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치 어 회장이 ‘다짜고짜 나타나서 난 준비된 연인이라고 외치는 여인’이나 다름없이 KB 구성원들에게 비쳐지고 있고 그래서 무면허 운전자 운운하는 대자보가 붙고 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어느새 어 회장이 취임 후 기본적 자리는 잡았을 만한 시간이 지났다. 초기에 날선 개혁 필요성 강조로 조직에 경각심을 잘 심었다면, 본격적인 봄이 열리는 4월부터는, 어 회장이 ‘소통과 이해’를 좀 더 구하는 은근한 방식을 택했으면 한다.

   
 
지금 어 회장이 (하나금융이나 신한지주 같은 경쟁사들까지 포함된) 한국 금융시장 전반의 경쟁력까지 나서서 걱정해 주고 논하기엔, 일방적이고 빠르고 강한 그의 톤에 내부 구성원들이 보이는 반발이 극심한 것 같다. 집부터 다스려야 나라를 다스리고, 연애를 먼저 해야 결혼을 하는 것인데, 집안 다독이기도 못하면서 거시적 과제까지 논하고 있다. 느린 속도와 싱거운 진행의 고백을 담은 ‘4월 이야기’를 어 회장에게 추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