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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으로 일군 민간 금융의 아버지 ‘거인 이희건’

‘한국 금융 등불 지다’…故 이희건 신한은행 명예회장

이종엽 기자, 임혜현 기자 기자  2011.03.29 09: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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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한 세대가 사라지자, 한 시대가 끝났다”

신한은행 이희건 명예회장이 지난 2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신한지주와 신한은행 등은 당초 조용한 장례를 원한 유가족의 뜻을 존중, 조용히 고인의 서거를 애도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49재를 기점으로 추모식을 통해 젊은 직원들에게 신한 정신을 고취하고 유지를 되새기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 또한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故 이희건 명예회장
이 같은 분위기는 오랜 시간 행장을 역임하며, 회사 발전에 기여해온 라응찬 전 회장과 신상훈 전 사장 등이 신한지주를 떠나고 신한은행에서도 이백순 행장이 물러나는 등 최근 급격한 변동이 남대문로를 휩쓴 바 있는 가운데 나오는 것이라 특히 주목된다.

지도부 교체는 ‘한동우-서진원 체제’가 출범해 지주와 은행을 다잡고 있는 것으로 수습을 시도해 볼 문제지만, 이번에 닥쳐온 고인의 별세는 지도부의 급격한 교체와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평가다.

그러므로 오히려, 한 시대를 매듭짓는 차원에서 고인의 지난 날이 갖는 의미를 공감대로 확인, 신구세대 임직원간 결속과 재일교포 주주들과 국내에 뿌리내린 신한금융그룹의 화합을 도모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한이 쌓아온 성취의 원동력을 재발견하자는 점에서도 고인의 지난날에 대한 의미 확인이 필요하다는 점도 부각되고 있다.

◆ 차별 딛고 일군 금융기관 설립의 꿈

일제 감정기, 일찍이 고인은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입신의 길을 찾아 떠났다. 가난한 경상도 시골에서 태어난 이 명예회장은 고학으로 메이지대학 전문부까지 고학으로 마치면서 상업을 도모하던 중, 일본 땅에서 2차 대전 종전을 맞았다.

아직 관존민비 사상이 투철한 당시 시대배경을 생각한다면 그도 응당 운영하던 전방을 걷어치우고 바로 귀국, 신생 조국에서 관직 하나쯤을 차지하려 노력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명예회장은 귀국하지 않고 오사카 한국인들의 이익 보호에 구심점으로 나섰다. 패전했다고는 하지만 전후 물가 앙등 등을 경계하던 일본 경찰당국은 한국인들이 꾸리는 시장을 암시장 단속이라는 명분으로 탄압의 수위는 과거와 다르지 않았다.

이 명예회장은 1946년 오사카 쓰루하시 시장 폐쇄에 항의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이후 쓰루하시 상점가동맹 초대회장으로 추대(1947년 8월)됐다.

이 같은 고비를 넘기고 한푼 두푼 비축한 알토란 자금을 축적한 기억 때문일까. 한국 상인들의 염원은 한국인이라고 차별하지 않는 민족 은행을 갖는 일이 본격화 된 것과 결코 무관치 않다. 이러한 동포들의 열망을 논의하는 핵이 된 곳도 쓰루하시 상점가동맹이었고, 이 명예회장을 중심으로 금융기관 설립 추진이 시작됐다.

   

1955년 오사카 외곽 재일동포들 중심으로 운영된 무허가 시장인 쓰루가시 시장에서 글로벌 금융그룹인 신한은행이 태동했다.                  회사 최초의 자리는 현재 편의점이 위치해 있어 과거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지만 분위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영세 상인을 갓 면해 초보적인 자본축적을 시작한 이들이 은행을 바로 세우기에는 무리가 따랐기 때문에, 그 징검다리로 이들은 일종의 새마을금고와 같은 금고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러한 노력들은 여러 곳에서 민족금고 형태로 나타났다. 일본 전역에서 이러한 노력이 일기는 했지만, 그 중 성공 모델이자 효시격인 곳이 바로 오사카흥은(大阪興銀)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955년 오사카흥은 신용조합이 설립되고 이듬해 39세 나이에 이 명예회장이 이사장으로 취임한 뒤 급성장을 시작한다. 탁월한 경영능력을 발휘해 지역내 우량 신용조합으로 발전시켰고 그 결과 1968년 신사옥 건립과 예금고 100억엔 달성 신화를 이뤘다.

이후 오사카흥은은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신용조합을 제치고 일본 내 가장 실적이 좋은 조합으로 성장, 1993년 7월 1일 관서지방 5개 흥은과 합병해 보통은행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관서흥은(關西興銀)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 금융 노하우 쌓아 젊은 은행 태동

이렇게 재일 교포들이 자리를 차차 잡아나가게 되면서, 본국에 투자를 하겠다는 열의 또한 뜨거워졌다. 재일한국인본국투자협회가 이때 간판을 내걸었고, 일본에서 대판흥은과 관서흥은 설립으로 금융 노하우를 축적해 온 이 명예회장 역시 당시 그 구심점을 맡게 됐다.

이 회장은 먼저 단자사인 제일투자금융(주) 설립(1977년 8월 10일 영업 개시)과 이후 경영 능력 발휘(새서울상호신용금고 인수 등)로 교포들과 일반 국민, 당국의 긍정적 평가를 쌓아나갔다.

1981년 5월, 드디어 정부는 재일한국인본국투자협회(당시 협회 회장 이희건)에 긍정적 답변을 하게 되고, 그해 7월 교민은행 설립 발기인 대회가 열렸다.

당시 당국은 1982년 경 5개 시중은행을 차례로 민간의 손으로 넘기는 민영화를 순차적으로 진행했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이미 민영화된 산업은행과 한일은행에 이어 연내에 제일은행과 서울신탁은행을, 그리고 내년에 조흥을 은행을 차례로 민간에 넘기기로 한 것은 말하자면 시중은행 경영에서 공익성 대신 상업성에 보다 충실하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금융기관이라는 명칭이 잔존해온 것에서 보듯, 은행권의 행보는 이러한 오랜 민영화 역사에도 불구하고 관치로 얼룩져 왔다.

이런 와중에 고국에 보탬이 되고자 들어온 재일 교포들의 움직임, 특히 일본에서 금융업을 해 본 노하우를 가진 이 명예회장의 등장은 국내 은행계에서는 큰 파장을 낳게 된다.

이 명예회장과 손발을 맞추며 신한은행 출범의 대업을 이룬 김세창 초대행장은 기성 금융기관인 외환은행 출신이긴 하나, 외환은행 뉴욕지점장으로 외국환업무와 국제마인드를 갖추었던 당시로서는 드문 인물이었다. 김 초대행장은 당시 첫 걸음마를 시작한 증권거래소로 자리를 옮겨 전무이사로 일한 경험도 갖고 있어 앞으로 금융시장은 고객 지향적이고 글로벌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음을 내다볼 줄 아는 인물이었다.

오사카에서 독학으로 대학을 마친 후 자수성가를 하며 교포은행의 구심적 역할을 해온 이 명예회장과 미래 금융의 청사진을 갖춘 김 초대 행장 등을 필두로 한 은행 지도부는 금융기관의 구습을 답습하지 않고 높은 은행 문턱을 허물자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초기 투자를 아끼지 않은 첨단 전산망 구축 등의 하드웨어적 요소에 강인한 소프트웨어(인적 자원)를 겸비한 신한은행은 창립 초기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창립 첫날, 본점 영업점 1개로 시작한 초라한 개점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개점 준비 상황부터 신한은행원들의 노력을 눈여겨 본 국민들은 1만7520명이나 내왕해 총 5017계좌를 개설(당시 돈으로 357억4800만원)하는 등 신한은행이 순조롭게 출항, 항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82년 7월 첫 민간은행인 신한은행의 창립식과 창립주주총회

◆ ‘시중은행 중 신한이 단연 최고’ 

이후 신한은행은 10년여 만에 외형적인 면에서는 물론 고객 평탄에서도 ‘국책은행 중에는 국민, 시중은행 중에는 신한이 으뜸’이라는 평을 얻으며 은행을 안착하게 된다.

이후 신한생명 설립, 역외펀드 조성 추진 등 1990년대 각종 금융 대형 이슈들마다 신한과 이 명예회장의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이 명예회장은 부지런하게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이러한 성공은 신한 임직원들이 이 명예회장의 열망에 부응, 그간 기존 금융기관들이 쌓아놓은 진입장벽을 허무는 데 똘똘 뭉친 데 힘입은 바 크다.

다행히 신한은행은 창립 준비 단계에서 진행된 경력 및 신입 공채에서는 기존 은행들의 인사 적체와 층층시하의 엄격한 피라미드식 직장문화에 염증을 느끼면서 새 은행에 미래를 걸어보려는 우수 인재들이 많이 지원했다. 이런 인재들이 모여 워크숍 활성화와 맹폐(猛吠), 그리고 적극적 영업 정신 함양을 기치로 신한은행의 경쟁력을 쌓아나갔다.

신한은행 직원들이 ‘동전수레’를 끌고 작은 점포들을 돌아다니자 은행계는 경악했다. 물론 상인들로서는 동전을 수시로 다량으로 필요로 하므로 이 같은 배려가 고마웠겠으나, 기존 은행계 분위기에서 보자면 ‘은행원’이 ‘동전수레’를 끌고 다니며 영업 기반을 닦는다는 게 상상도 못할 일에 가까웠다.

전단지를 돌리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시내에서 단체로 구보를 하는 등, 은행계의 정형화된 이미지에서 벗어난 행보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은행이 생기면서 은행 문턱이 한층 낮아질 것 같다는 느낌을 국민들에게 심어나갔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맹폐라는 독특한 정신교육 시스템. 일단 한 번 ‘링’에 서면 절대로 상대에게 밀리지 않는 정신을 함양하도록 했다. “자신 없으면 나가!”, “못 나가 네가 나가!”, “싫어! 안 돼!” 등등 셔츠 팔뚝을 걷고 허리에 손을 얹은 채 2인이 고함을 맞질러 대는 이 같은 교육은 큰 효과를 낳았다.

훗날 신한의 독특한 직장 문화를 연구한 어느 교수는 ‘신한뱅크웨이’라고 명명하였고, 이는 오늘날 ‘신한웨이’로 불리고 있다.

◆ 민간금융 획 그은 신한의 저력

신한의 적극적인 행보와 빠른 성장세는 당국의 규제에서 일부나마 자유로운 신한만의 입지를 확보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1980년대 초반 이미 우리 은행계는 은행 민영화의 시대를 선언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우리나라 은행들은 오랜 시간 관치금융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 명예회장(과거 신한은행 회장) 역시 과거 이 같은 물결에 전면적으로 저항하지는 못했다. 1985년과 1991년(김세창 초대행장과 김재윤 당시 행장 사퇴 건) 사례들만 보더라도, 당시 언론은 상대적으로 당국 입김에서 자유로운 신한은행조차도 당국 의중에 따라 은행장을 경질했다는 평을 내렸다.

하지만 신한은행은 이 명예회장이 당시 회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은행들이 관치 물결에서 행장 임면(任免)은 물론 지배구조에서 옥상옥(屋上屋)의 왜곡된 후속 조처까지 떠안는 사정에서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1985년 일부 은행들은 대거 행장 교체를 단행하게 됐는데, 이에 대한 여러 잡음을 줄이고자 전임 행장들을 회장으로 선임하는 상황을 맞게 됐다.

경영의 필요성에 따른 직제 개편이라기 보다는 관치에 대한 비판론을 잠재우기 위한 절충안인 셈인데, 행장 선출 문제에 이어 낙하산 회장까지 등장한 일부 은행의 경우 관치의 그림자가 더욱 짙어지는 부작용을 이중적으로 지게 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신한은행은 이미 재일교포 주주 측을 대변하는 이 명예회장이 회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행장 교체 문제만큼은 몰라도 행장 위에 회장까지 당국 입맛대로 올리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었다.

1991년 교체 문제 역시도 라응찬 행장(이후 지주 회장)을 발탁하는 카드를 꺼내게 됐다. 라 회장이 신한은행 기반 확충에 이후 오랜 시간 매진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결론적인 이야기지만 ‘이희건 회장 체제’는 금융을 관치 대상으로 보던 1980년대와 1990년대 흐름 속에서 이질적이고 독보적인 것이었다. 당국은 이 명예회장을 구심점으로 해 놀라운 실적을 내는 신한은행과 재일 교포 주주들을 무시하기 어려웠고, 관치에서 자유로운 경험을 하면서 훈련된 인력자원들은 이후 신한은행이 일본에 역진출하고 IMF 시대를 넘기는 데 상당한 자산이 됐다.

   
신한은행 태동지인 쓰루하시 시장은 아직도 많은 재일동포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으며, 이곳의 독특한 문화를 보기 위해 '일본 내 또다른 한국'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 햇볕정책 원조 ‘이희건’

이 명예회장이 성공한 재일 교포 사업가이자 은행계의 거인으로 남긴 업적들은 여러 차례 조명된 바 있으나, 그가 재일 교포 사회에서 몇 가지 드라마를 남긴 일화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92년 ‘이왕이면 한국 물품을 사자’는 한국 물산 운동을 재일 교포 사회에서 일어난 데에는 이 명예회장이 배후에서 역할을 한 바에 힘입은 것이다. 훗날 ‘바이 코리아’라는 현대증권 금융상품 슬로건도 있었지만 이 물산 장려 움직임은 ‘바이 코리안 운동’이라며 1992년 일본 서부 지방을 중심으로 재일 교포 사회에서 선풍을 일으켰다.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총련계에 몸담거나 조총련계에 가깝게 지내던 교포들을 대거 민단 쪽으로 옮기게 한 고향방문운동이라는 인도적 차원의 운동에도 이 명예회장은 관여한 바가 깊다.

김일성 북한 체제에 가깝게 선을 댔다는 전력 문제와 경제적 애로사항으로 인해 (남한 지역) 고향에 방문하지 못하는 동포가 많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민단은 ‘구정성묘’라는 명분 하에 고향방문 운동을 벌였다(1976년 1월경).

이 명예회장은 당시 이에 공감, 일본 언론에 대대적으로 광고를 내 조총련계 동포들에게 조건 없이 귀향 자금을 지원해 주겠다고 했는데, 당시 일부 조총련계 인사들로 추정되는 이들로부터 이 명예회장이 협박을 받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움직임은 당시만 해도 민단에 비해 조총련이 상당히 강했던 경향을 이후 민단 우세로 바꾸는 데 첫 단추가 됐다. 이후 한국이 북한 측에 비해 경제적으로 확실히 우위에 서게 되면서 이 같은 경향은 더욱 굳어졌으나, 결국 일종의 ‘햇볕정책’이 민단과 이 명예회장 등  재일 재력가들 그리고 우리 당국의 교감 속에 이미 이뤄졌다는 점은 김대중 정부의 그것에도 상당히 앞서는 것이다.

이러한 이 명예회장의 업적은 훗날 남북관계사에서 연구 가치가 높다는 지적이다.

지난 20세기 현해탄을 넘나들며 산업과 금융, 민족 문제 등 여러 방면에서 기여해온 이 명예회장의 족적을 되새기는 문제는 단순히 한 세대, 시대를 정리한다는 점 외에도 기업의 성립과 성장, 사회 공헌이라는 ‘지속 가능 경영’ 이라는 측면에서 향후 신한금융그룹을 넘어 대한민국 대기업들은 반드시 새겨야할 절대 명제를 남겼다.

이종엽 기자 lee@newsprime.co.kr, 임혜현 기자 tea@newsprim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