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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본점 앞에서 ‘百-마트 분리’ 길을 묻다

[5월 분리 임박] ‘고급지향’ 마이웨이…‘견강부회(牽强附會)’ 80년 史

임혜현 기자 기자  2011.02.28 15: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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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매출 20조원의 ‘유통 여왕’ 신세계. 지난해 개점 80주년을 성대히 치러낸 신세계가 2011년 거대한 몸집을 둘로 나누겠다는 선언을 해 연초부터 유통계가 술렁이고 있다. 이번 분리로 탄생할 몸통은 매출 5조4000억원 규모의 신세계백화점과 11조5000억원대의 이마트다.

일각에서는 백화점과 이마트 사업 분리는 부문별 업태 특성을 고려한 작업, 즉 전문성을 제고하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럴 경우 부문별 책임경영이 가능하고, 수익성을 끌어올리는 게 한결 손쉬워질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아울러 이 같은 효과를 기반으로 백화점과 할인마트 유통이 갖는 다소 상이한 고객층에 대한 봉사(서비스) 특화 및 강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도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이번 신세계의 업태별 인적분할 작업이 향후 국내 유통업계의 판도변화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인 셈인데, 막상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런 긍정적 동인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세계의 경영철학을 추출해 내면 이번 분리 작업은 결국 명품 경영을 지향하는 공룡 두 마리가 동시에 나온다는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내다보는 시각이다.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점을 극복하지 못한 ‘철학 부재’라는 경고음인 셈이다.

◆ 시민 휴식처 ‘樂天地’ 빼앗아 연 ‘다다미 맞이방’

2010년 신세계가 개점 80주년을 ‘주장하는’ 이벤트를 대대적으로 펼치자 일각에서는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신세계 측이 이 같이 주장하는 근거는 다름 아닌 현재 명동에 소재한 신세계 백화점 본점 자리에 일제 식민 치하인 1930년 10월, 일본 자본인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지점이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미쓰코시 백화점은 일본을 대표하는 백화점으로 우리 땅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식 백화점이다. 1930년 미쓰코시 백화점 설립 이듬해 1931년 조선인 자본가 박흥식(1903~1988)이 기존 화신상회의 3층 콘크리트 건물로 증·개축해 경쟁에 나서면서 정통 일제 자본 대 친일 토착 자본의 경쟁이라는 구도가 형성된다.

   
1930년 대 미쓰코시 경성지점은 일제에 의한 수탈과 지배의 표본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 백화점 역사가 본격적 개막을 하게 된다. 다만, 화신백화점의 경우 백화점 사업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지적도 많은데, 이는 상회로 영업 허가를 득했고, 이로 인해 ‘백화’라는 선전을 하는 데 애로가 실제로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최초의 근대 백화점 미쓰코시 경성지점을 호의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것은 당시 경성부 청사(오늘날의 서울특별시청. 일제는 조선 통치를 용이하게 하는 수단의 하나로, 한성의 특별지위를 일개 부로 강등조치 했다)가 1926년 현재의 시청 위치로 이전하면서, 미쓰코시 경성지점, 즉 오늘날 신세계의 본점 자리는 한동안 비어 있게 된다. 이를 시민들은 낙천지라고 부르며 가설극장, 서커스 등의 시민 놀이터로 애용했다.

일종의 토지 거래를 통해 새롭게 민간 상업 시설이 들어선 것을 전적으로 폄하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공원 내지 녹지적 의미의 부지로 둘 수도 있었던 것을 ‘고급 상업시설’에 내주게 되면서, 결국 ‘명동=신마치=일본인만의 거리(상권)’라는 도식을 완성해, 당시 조선인 대다수로부터 명동을 유리시킨 것이 미쓰코시 경성지점 오픈이었다고 할 수도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흥식의 화신’은 일종의 잡화점 개념으로 한층 미쓰코시에 비하자면 낮은 가격대의 상품을 중심으로 영업을 하였던 것이며 미쓰코시는 일본 본토의 그것을 그대로 옮겨온 고급 지향의 길을 걸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당시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여는 등 계몽에 앞장서다 이후 친일파로 변절한 윤치호는 이 같은 경향을 중요한 부분들은 모두 일본인 손으로 넘어가고 조선 사람은 나머지만 간신히 허락받지만 “(1922년 3월18일 일기 등) 일본 사람들이 별로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악마도 잘 알고 있다”고 개탄했다.

미쓰코시 경성지점은 취급 품목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을 1층에 다다미방을 운영, 사실상 일본인(당시 표현으로는 내지인) 고급관료나 부유층들의 습관을 배려하는 식으로 영업해 오늘날로 보면 ‘명품관’에 해당하는  ‘분리 정책’을 고수했다.

당초, 신세계는(1987년 발간한 社史 ‘신세계 25년의 발자취’ 등을 참조) 신세계의 연혁을 1963년 7월15일부터로 기록해 왔다. 이 책에 실린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전 회장의 기념사에도 신세계가 창립 25주년을 맞았다는 대목이 실려 있다. 이 전 회장은 “신세계가 창립된 지 어언 25년이 지났다”고 밝히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세계는 창립일을 1963년 11월11일로 잡고 있었다.

그런데 개점 80년이라는 모호한 개념까지 끌어다 대며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것, 더욱이 그 거슬러 올라가 만나려는 대상이 일제 식민지를 수탈하기 위해 진출한 일본 자본의 지점이라는 점은 ‘철학 부재’ 이상의 단어로 요약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고급 고객층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는 자부심을 연원을 새로 찾는 배경으로 볼 수 있을 것인데, 이 같은 현 경영진의 정서가 신세계가 2000년에는 강남지역 첫 점포인 강남점을 개점했고 2009년에는 강남점 재단장-확장 개점을 통해 5만1240㎡(1만5500여평)의 명품 백화점으로 재탄생시키는 등 명품 지향성 경영 전략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더욱이 2007년에는 신세계 숙원사업이었던 본점(미쓰코시 경성지점 터)을 재단장 했다. 이로써 본점은 문화예술과 접목된 세계 최고 수준의 고품격 백화점으로 도약시켰다는 평가가 나왔으나, 결국 철학이 부재한 일련의 행보로 인해, ‘사업보국’으로까지 평가가 승화되지는 못했다.

◆ 명품위주 경영 논리, 사업 목적 변경 ‘잡음’

이 같은 철학 부재는 상인의 이재(理財)에 철학을 강요할 수 있는가, 혹은 이 문제가 경제적 이득을 성취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는가라는 문제로 귀결되는데, 신세계의 경우처럼 (식민 치욕도 감수하는) 소위 ‘명품 전문 업체 뿌리 찾기’에 집착하는 유통업체가 이후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이나, 그 주변의 평가 등이 그다지 매끄럽지 않다는 점을 입증하면 충분히 답으로 갈음할 수 있을 것이다. 

신세계는 그 연원을 한때 미쓰코시 백화점에 두지 않고 화신 백화점이 근대 백화점의 발상지라면서 종로통에 신세계 백화점 종로점을 짓기로 한 적이 있었다. 종로는 명동(신마치)에 대응하는 민족 자본의 집결지로 의미가 있다.
현재 종각 맞은 편에 위치한 종로타워 자리는 과거 종로통 상권을 상징하던 화신 백화점이 있던 자리이며 이를 광복 이후 삼성생명이 소유하면서 신세계 백화점 종로점 건설 계획을 발표(1993년)했다.
 
하지만 골조공사가 완료된 이후 건축 변경 방침이 결정되는 바람에 공사가 전면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맞게 된다. 이어서 터진 외환위기(1997년)로 건물의 용도가 업무시설로 전환 되면서 신세계의 뿌리 찾기는 여기서 일단 멈췄고, 이후 2010년대에 들어서서는 미쓰코시에 연원을 두는 80주년 논란이 불거진 것이다.

   
신세계백화점이 지난 해 개점 80주년 행사를 실시했지만 관련 업계에서는 부정적 시각으로 보는 견해가 강해 결국 '창립'이라는 단어를 쓰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환 위기는 신세계에 뿌리 찾기의 기회만 접게 한 것은 아니다. 신세계는 1997년 IMF  당시 이마트를 선보이며 사세 확장을 주도하는 길을 걸었다.

당시 신세계는 백화점을 짓기 위해 매입해 두었던 것으로 알려진 경기 산본과 전북 전주, 부산 해운대는 물론 경남 진주 등의 프로젝트를 모두 할인점으로 바꾸고 나섰다. 이로 인해  할인점의 핵심 요소인 입지를 조기 선점했으며 이것이 신세계 백화점에서 분리를 하게 되는 이마트의 본격 성장사가 된다.

그런데 이처럼 신세계는 이마트라는 나름대로 새로운 캐시 카우를 잡았으면서도, 고급화 지향이라는 논리를 버리지 못하게 된다.

2010년만 상황만 보더라도 신세계는 지난 7월 14일 경기 안성시 공도읍에 있는 쌍용자동차 공도출하장 터 20만여㎡를 1040억원에 사들였는데, 이때 언론은 이를 엔터테인먼트와 스포츠, 레저기능이 포함된 대형 복합쇼핑몰을 만들 계획인 것으로 취재, 보도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 킨텍스 2단계 복합시설 터 2만8628㎡를 976억원에 사들이는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 신세계는 킨텍스 2단계 복합시설 부지에도 백화점 또는 명품 쇼핑몰을 건설할 것으로 알려져 화제를 모았다.

이런 상황에 신세계는 최근 ‘사업목적’에 갑자기 골프장 사업을 추가해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백화점과 이마트도 분리하겠다는 마당에 그 저의에 대한 해석론이 분분했다. 확실한 것은 없으나 다만, 지금까지 국내에는 백화점이나 쇼핑몰, 명품아울렛 등을 통틀어서 쇼핑단지 안에 골프장이 들어선 곳이 없다(제도적-물리적 불가능). 하지만 교외라면 문제가 다르다는 것.

결국 신세계가 향후 고급화 경향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골프장과 결합한 종합 고급 유통사업을 지향함을 시사한다는 해석이 힘을 얻는다.

문제는 이 같은 고급지향성 논리가 여러 잡음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2007년 법제처 유권해석 의뢰라는 희대의 상황으로까지 번진, 경기 여주 신세계첼시 프리미엄 아웃렛의 수도권정비계획법 위배 논란이 그것이다.

신세계의 사업 추진은 “자연보전권역에서 1만5000㎡ 이상 판매시설을 지을 수 없다”는 법문으로 인해 당시 건설교통부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하지만, 건물 일부의 소유주를 바꾸는 ‘편법’으로 신세계는 문제를 비켜 나갔다.

◆ 전문성 위장 오너 일가 재산 분할 시각도

이처럼 일련의 사업행보들은 신세계가 매출의 상당한 부분을 대형할인점(마트)에서 얻고 있으면서도 그 중심적 경영 줄기를 백화점에 두고 있다는 인식을 내외에 널리 퍼지게 하기 충분했다.

신세계 분할 소식에 증권가에서 이마트 법인보다는 백화점 법인에 더 눈길을 주는 것도 단순히 “성장 정체 중인 대형마트보다 백화점 업황이 긍정적(도현우 KTB투자증권 연구원 보고서)”만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신세계의 귀속회사는 신세계인터내셔널와 신세계첼시, 광주신세계 및 신세계 의정부역사다. 조선호텔과 신세계푸드, 신세계I&C, 이마트현지법인 등은 이마트에 귀속되는데도, “이마트에 귀속되는 중국법인은 올해 800억원의 지분법 손실이, 신세계에 귀속되는 신세계인터내셔널은 지분법 이익 223억원이 예상돼 귀속법인도 신세계가 유리하다”는 분석(KTB證)이 나올 정도로 고급 업종인 백화점에 ‘몰아주기’를 하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결국 이 같은 분할 작업은 백화점과 대형할인매장업 간의 전문성 지행이라기보다는 정용진씨와 정유경씨간 재산분할이라는 내면적 이유에 의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도 읽히고 있다.

저명한 신용평가기관인 S&P가 이번 인적분리 문제에 관련, 신세계의 신용 등급을 부정적 관찰 대상 지정으로까지 밝힌 점도 이처럼 신세계가 몸통을 둘로 나누는 대수술을 함에 있어, 더 멀게는 그간의 경영 패턴에 있어 고급지향성 영업 논리를 밟아오면서 보인 여러 문제를 지적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결국 신세계가 그 스스로의 연원을 어디에 두는가를 보는 관점은 단순히 경쟁업체들에 비해 역사가 오래인가를 따지는 유치한 논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유통업 경영의 지향이 무엇인지(고급화된 업체라는 점에 매몰돼 있다고 할 수 있음), 혹은 그 논리가 향후 사업을 추진하고 이를 분리하는 과정에 있어 건강한 사고의 배경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고 있다.

신세계가 미쓰코시 경성지점 80년을 경축한 점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민족적 정서면에서만 초라한 일이 아니라, 스스로의 철학 부재를 드러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凶事’로 향후 평가될 수 있다는 기우마저 낳고 있다. 이 같은 점을 삼일절을 맞아 간략히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