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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비지’와 한동우의 시대

임혜현 기자 기자  2011.02.14 17:0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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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1987년 대통령 직선 선거에서는 군인 출신인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이 선거는 군사정권 종식과 민주화 성취의 결실을 맺는 선거였으나, 군인 출신 후보가 야당 정치인들보다 표의 총합에서는 뒤지고도 야당 후보간 분열로 어부지리를 한 선거로 평가받았다.

당시 노태우 후보는 820만표를 얻었고, 김영삼 후보는 630만표, 김대중 후보는 610만표로 표가 갈렸다. 이 때문에 1985년 3월 29일 출범했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은 후폭풍에 휘말리기도 했다. 결과에 대한 실망감이 비지 논쟁(DJ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 선택 여부)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공격으로 표출됐던 셈이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등장한 노태우 정부는 ‘보통사람의 시대’를 기치로 이전 정부의 적폐를 청산하고 5공화국 청문회를 통해 이전 정권과 고리를 끊고 나서면서 갈채를 받는 듯도 했으나, 강권통치 후에 들어서는 정부가 받을 수 밖에 없는 ‘무르다’는 평가를 평연적으로 받았고, 물가 문제와 노동 운동 격화 등으로 고전했다. 이후 금융실명제 실시와 관련, 노태우 비자금 논란으로 도덕적 평가마저도 크게 실추됐다.

14일 신한금융지주가 차기 회장 후보로 한동우 후보(전 신한생명 부회장)를 단독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신한금융지주 차기 회장 최종후보로 단독 추대된 한동우 전 신한생명 부회장
이번 회장 후보 최종 내정을 보면, 신한 최고경영진 교체의 원인이 됐던 라응찬 전 회장이나 ‘신상훈-한택수’ 친분 문제가 거론되는 등 전임자의 그림자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최영휘 후보(전 신한금융 사장)와  한택수 후보(국제금융센터 이사회 의장)가 재일교포 주주들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언급됐고, 최종 승자인 한 후보는 ‘라응찬 지지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용퇴를 빨리 결정한 류시열 회장대행처럼 재일교포쪽 지지 후보군이 빠르게 이합집산을 했다면, 이번 결과물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이런 복잡한 사정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물’로까지 회자되던 노태우 정부처럼, ‘한동우 체제’ 역시 비판론자들로부터 늘상 감시를 당하고 전임자 세력과의 관계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시대가 될 수도 있다. 재도약을 위한 기반을 닦으면서도 크게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가 될 공산이 크다는 것과도 연결된다.

다만 다행한 점은 그나마 내부 선출된 회장이라는 점이 강점이라는 데 있다. 행내에서 회장이 나왔다는 것에 대해 직원들이 좋아할 긍정적 요인을 안고 있는 셈이다. 외부 인사는 신한웨이를 모를 수 있고, 부하 직원들 역시 신임 회장의 철학이 어떤지 몰라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는 다행이다.

아울러 은행을 잘 알고 전체적으로 생명보험 등 다른 업무를 꿰뚫고 있는 것도 강점이라면 강점이다. 따라서, 한 최종후보 스스로 ‘라응찬 시대’에 대한 영향력을 끊는 노력만 한다면, 시대를 거슬렀다는 비판에서만큼은 자유로울 수도 있을 최소한의 발판은 마련돼 있다고 하겠다. 아마도 노 전 대통령이 ‘비지’ 세력이 모은 표의 무서움을 두고두고 잊지 않았다면 좀 더 성공적인 대통령으로 기억될 수 있었을 것처럼, 한 최종후보 역시도 이번 선출 과정 내내 나온 재일교포와 기타 주주들이 자신의 경쟁자들에게 보여줬던 ‘비판적 지지’를 기억한다면, 호평은 몰라도 혹평만큼은 충분히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