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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재벌가 폭행’ 사법처리를 주목한다

전훈식 기자 기자  2010.12.21 11:5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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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프랑스 도시 ‘칼레’는 영국과의 백년전쟁 당시 적에게 포위 당하자 항복 사절단을 파견했다. 시민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칼레 도시 대표 6명이 적에게 처형됐다. 이 6명은 자진해서 나선 이들이었다. 모두가 머뭇거리는 사이 칼레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처형을 자청했고 이어 시장·상인·법률가 등의 귀족들도 동참했다. 사회적 지위에 상응한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어원이 태어난 상황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정치인들과 기업인들, 학자들이 저마다 사회공헌 활동을 하고 있다지만 딱히 감동적이질 않다. 기업 임직원들이 각종 봉사활동에 나서고 있고 기업의 예산이 ‘딱한 사회’ 곳곳으로 향하는 일은 분명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공헌’에는 공경과 배려 그리고 최소한의 애정이 있어야 진정성이 전해지는 것이고, 거기서 감동이 생긴다.     

돈 많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소위 ‘있는 사람들’의 행실이 특히 중요하다. 이들이 진정성을 담아 선행을 하면 사회 모범이 되고, 사회가 훈훈해진다. 비록 연출된 선행이라 할지라도 꾸준하게 행하면 감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기업인들의 그런 가치 있는 행실을 우리는 왕왕 봐왔다.

하지만 엉뚱한 사고를 쳐 소위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먹칠하는 경우도 있다. ‘돈이 곧 권력’이라는 좋지 않은 등식을 증명해 보이는 듯한 볼썽사나운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끊이질 않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은 고사하고, ‘가진 이’의 폭행과 폭언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 산재해 있는 것 같다. 
 
지난 1994년 ‘건방진 프라이드’ 사건은 재벌 2세 폭행 사고의 대표격이었다. 롯데 신준호 부회장의 아들 신동학씨와 중앙정보부 이후락 부장의 손자이자 제일화재해상보험 이동훈 회장 아들 이석환씨 등 4명이 그랜저로 드라이브를 즐겼다. 그런 와중에 프라이드 승용차가 끼어들자 차를 세우게 한 뒤 시비가 붙었다. 프라이드 운전자 정 모씨가 기분 나쁘게 쳐다봤다는 이유로 집단 폭행을 가했고 벽돌과 화분으로 정씨 일행의 머리를 가격했다. 프라이드에 함께 타고 있던 강 모씨는 뇌출혈을 일으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 사건은 한동안 사회이슈가 되면서 ‘있는 집 자식’들에 대한 사회적 반감을 극도로 고조시켰다. 재벌가 2·3세의 이미지가 ‘부모 잘 만나 버릇없이 커온 못 돼먹은 사람들’ 정도로 머물게 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최근엔 이 보다 더 엽기적인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철이 들어도 한참 들었어야 할 나이의 재벌가 중년 경영인들이 부하 노동자들을 비상식적으로 폭행한 것이다.        

지난 10월 SK 최태원 회장의 사촌동생으로 최철원 전 M&M 대표는 탱크로리 화물차 운전기사 유모(52) 씨를 사무실로 불러 야구방망이로 때리고 그에게 ‘맷값’ 2000만원을 던져줬다. 최 전 대표는 골프채로 사무실 직원들을 엎드려받쳐 시켜 때리고 폭언을 일삼기도 했다 한다. 맷값 사건으로 구속된 최 전 대표는 자신의 모교에 15억원이라는 거금을 기탁하고, 천안함 사태 때 구조활동 중 사망한 고(故) 한주호 대위에게 성금을 전달하기도 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가(?)였다.   

지난 19일엔 금호그룹 박삼구 회장의 6촌 동생이 일을 저질렀다. 청소용역업체 운영했던 박래권 사장은 직원에게 칼을 들이대며 폭행했다. 비록 그 흉기가 카터칼이긴 했지만, 직원을 상대로 칼을 휘둘렀고 골절상 등 상해를 입혔다. 박 전 사장은 합의금 200만원으로 사건을 무마하려 했지만, 이 사건은 외부로 알려졌고 박 전 사장은 경영에서 결국 물러났다. 폭행의 이유는 놀랍게도 ‘청소불량’이었다. 박 전 사장이 평소 직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뤄 짐작할만하다.

맷값을 정해놓고 길에서 사람을 야구방망이로 때리더라도 때린 측에서 ‘상방간 합의 하에 진행됐다’고 주장하면 집행유예 내지는 벌금 정도로 해결이 나는 사회다. 학부모가 수업이 맘에 안 든다고 여자 강사의 얼굴을 때리고, 맷값을 던질 수 있는 나라다.

최근 벌어진 재벌가 장년들의 직원 폭행 사건은 공정하게 처리돼야 한다. 직원들을 봉건시대 하인 다루듯 폭언·폭행하는 사례가 단지 이 두 건뿐일까. 재벌가 2·3세 경영인들은 어찌 됐건 ‘거저 얻은 이들’이다. 지위와 돈과 권력을 자연스레 가지게 된 이들이다. 

   
 
재벌가 중년들의 ‘맷값 폭행’과 ‘카터칼 사건’의 사법 결과를 주목한다. 법은 공평하다지만,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신세 한탄하는 이들에게, 이 사건은 우리나라 법리 잣대가 정말 ‘가진 자’ 편으로 기우는 것인지 평가할 계기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