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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이희건과 글로벌 신한은행…시작은 미미했지만

[현지 취재] 금융계의 신화, 신한Way를 답하다 - ②

이종엽 기자, 임혜현 기자 기자  2010.12.21 11:4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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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최신의 경영 이론이 득세해도 결국은 기업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건 고객과 소통하고 믿음(신용)을 사는 ‘상인 정신’이다. 금융기관이 많은 신금융기법과 금융공학으로 발전을 거듭해 나가도 기본을 좌우하는 건 고객을 끌어당기는 힘, 저 은행은 내 재산을 지켜줄 것이란 ‘신용의 힘’이다. 이들의 정신은 그래서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일본의 경제를 대표하는 상공업(商工業) 키워드를 흔히 ‘교토의 장인’, ‘오사카의 상인’을 이야기한다. 이들이 있었기에 개국 이후 빠른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이뤘고, 2차 대전 패망 후 경제 재건도 가능했다고 회자된다.

1000년 넘게 이어오는 오사카의 상인의 정신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노렌은 지킨다”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노렌(暖簾)은 상호가 그려진 무명천, 곧 그 가게의 신용을 뜻한다.

이런 충실한 상인 정신의 땅 오사카에서 상인 자본으로 출발한 신한은행이 한국 유수의 은행, 더 나아가 한국 대표 금융그룹 중 하나의 근간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신한은행의 모태가 된 오사카 쓰루하시 시장은 이희건 회장의 불굴의 도전 정신이 깃든 곳이다.
◆ 무허가 시장통에서 일군 금융입국

오사카 지하철 쓰루하시(鶴橋)역. 역 계단을 오르자 일본 여느 도시와 다른 분위기가 엄습한다. 어둡고 좁은, 그리고 좀 지저분하기도 한 길은 재래시장의 지붕을 막 씌우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재래시장 개편 초기와 유사하다.

쓰루하시 시장(鶴橋 市場), 쓰루하시 고려시장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고려(高麗)라는 명칭에서 보듯, 한국인들이 과거 식민지 설움을 당하던 시절(재일 조선인으로 불리던 정착 초기 시절)의 애환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좁은 골목 양쪽으로 이리저리 들어선 건물들 중 상당수는 이미 일본인 가게가 들어차 있어 한국인 시장이라고만 평가하긴 어려운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한쪽 골목은 ‘대구집’, ‘여수집’ 등 한국식 식당들이 성업하면서 야끼니꾸 등 우리 음식에서 연원한 요리들을 팔고 있고(일본인들은 원래 메이지 유신 전에는 짐승의 고기를 잘 먹지 않았고 이후 발달한 고기 요리들은 서양 내지 한국 영향을 받음), 반대쪽 골목들은 한국인들이 식재료, 각종 한국 상품 등을 판매하고 있어 우리나라의 1980년대나 1990년대 재래시장과 같은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다.

이 시장에서 오사카 거류 한국인들은 ‘한국인이라고 차별하지 않는 금융기관’의 비원(悲願)을 키웠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에도 많은 일본 거주 한국인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생활 기반을 이곳에 닦은 현실과 함께, 그나마 가진 걸 모두 정리해 돌아가려 해도 반출 금품과 재산 등을 제한한 미국 군정(맥아더 일본 점령군 사령부)의 조치로 인하여 이들은 “관부 연락선을 타고 금의환향하겠다”는 꿈을 다시금 접고 생활 전선의 고단한 전쟁을 이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패망했다고는 하지만, 전후 물가 앙등 등을 경계하여 경제적 병폐 처결에 앞장서고 있던 일본 경찰당국은 한국인들이 꾸리는 시장을 암시장 단속이라는 명분으로 백안시했다. 

결국 시장 폐쇄 등 탄압을 받던 오사카 거류 한국 상인들은 과거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고 내부불만을 돌리는 희생양으로 한국인들을 겨냥했던 악몽을 되살렸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나마 미국 군정이 이들을 보호했다는 것, 그리고 이제 독립국 국민으로서 목소리를 내 보겠다는 희망이나마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의기로 불행한 민족의 일을 떠맡고 나선 젊은 장돌뱅이 하나가 있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이 장돌뱅이가 신한은행 이희건 명예회장이다. 가난한 경상도 시골에서 태어난 이 명예회장은 꿈을 안고 도일, 메이지대학 전문부까지 고학으로 마친 청년이었다.

아마 가난한 이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또 아직 관존민비 사상이 투철한 당시 시대배경을 생각한다면 그도 응당 푼돈의 전방을 걷어치우고 바로 귀국, 신생 조국에서 관직 하나쯤을 차지하려 노력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탄압받는 ‘한국출신 무허가 시장 상인들’을 대변하는 일에 발이 묶인 그는 조그맣게 영위하던 고무 가게 일을 끝내 접고 귀국하지 못했다. 1946년 오사카 쓰루하시 시장 폐쇄에 항의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그는 1947년 8월에는 상점가동맹 초대회장으로 추대됐다. 

   
과거 50~60년대 쓰루하시 시장은 무허자 좌판들이 난립한 재일동포들의 고난의 삶이 묻어난 곳이지만 최근 한류 열풍을 타고 일본 내에서도 한국 음식과 한국문화를 찾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로 끊이지 않고 있어 격세지감을 느끼게하고 있다.

◆ “이희건 회장은 영원한 우리의 번영회장”

지금도 좁고 깨끗하다는 인상과는 거리가 있는 시장 길을 누비며, 기자들은 한국인(교포)상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이희건’과 ‘오사카흥은’에 대해 기억하는 이들을 수소문했다. 우리 말을 비교적 정확히(약간의 경상도 억양까지도) 구사하는 한 중년 부인은 이 명예회장에 대해 소상한 정보를 갖고 설명을 했는데, 대체로 다른 곳에서 교포 상인들에게 크로스 체크한 것과 대개 일치했다.

이 명예회장을 영원한 상가번영회 회장으로 기억하는 이들은 우리 땅을 결국 밟지 못하고 이곳에 뿌리내린 한국계 상인들의 후손들.

이 명예회장과 함께 일본 경찰의 탄압에 맞서던 이들은 그 무용담을 기억하고 있으며 이 명예회장이 갖고 있던 좌판과 가게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현재는 쓰루하시 시장 인근에 위치한 편의점으로 모습은 바뀌었지만 일대 상인들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었다.

시장에서 한국식 김치와 반찬류, 전 등을 파는 경남 창녕 출신 교포 2세인 김재옥(72, 여)씨는 “예전 오사카흥은은 이 일대 상인들이 하루에 한 번씩은 반드시 찾아가는 곳”이라며 “문턱이 높았던 일본은행들이 한국계 상인을 무시할 때 이희건 회장과 오사카흥은은 교포들의 삶을 지탱해 주던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회상했다.

한때 유행했던 캔의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에는 “더러운 뒷골목을 헤매고 다녀도 내 상처를 끌어안은 그대가 곁에 있어 행복했다”는 구절이 있다.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가난한 시절을 견뎌낸 이 명예회장에 대한 시장 상인들의 마음은 이 구절과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바가 있었고, 그 구전은 오늘까지도 남아 있었다.

   
오사카흥은의 첫 사옥이었던 이곳은 현재 재일동포 사업가 MK택시 유봉수 회장이 긴키산업신용조합으로 이어받아 과거의 맥을 잇고 있다.
◆ 비원을 모아 민족금고를 세우다

이 같은 고비를 넘기고 한푼 두푼 비축한 알토란 자금을 축적하자, 한국인 상인들의 염원은 한국인이라고 차별하지 않는 은행을 갖는 일이 됐다.

열망을 논의하는 핵이 된 곳이 쓰루하시 상점가동맹이었고, 이 명예회장을 중심으로 금융기관 설립 추진이 시작됐다.

그러나 시중은행, 지방은행, 금고 등으로 세분화, 계층화되어 있는 현재의 일본 은행시장을 살펴보더라도 영세 상인을 갓 면해 초기적인 자본축적을 시작한 이들이 은행을 바로 세우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중간적 역할 즉 징검다리로 이들은 일종의 새마을금고와 같은 기관을 세우기로 했고, 이 같은 노력들이 여러 곳에서 민족금고 형태로 나타났다. 일본 전역에서 이러한 노력이 일기는 했지만, 그 중 효과를 거뒀으며 효시격인 곳이 오사카흥은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955년 오사카흥은 신용조합이 설립되고 이듬해 39세 나이에 청년 이희건 회장이 이사장으로 취임한 뒤 급성장을 시작한다. 탁월한 경영능력을 발휘해 지역내 우량 신용조합으로 발전시켰고 그 결과 1968년 신사옥 건립과 예금고 100억엔 달성 신화를 이뤘다.

이후 오사카흥은은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신용조합을 제치고 일본 내 가장 실적이 좋은 조합으로 성장, 1993년 7월 1일 관서지방 5개 흥은과 합병해 보통은행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관서흥은(關西興銀)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과거의 영화는 사라졌지만 이 관서흥은 터 역시 현재까지도 잘 남아 상가 건물로 나름대로 번성하고 있다. 재미있는 일은 현재도 이 자리는 금융기관이 들어서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건대, 호사가들은 이를 두고 재운이 발복하는 곳이라 할 법도 하다. 참고로, 현재 신한은행 본점 터는 과거 조선시대에 관영 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서울에서도 재운이 성한 몇 안 되는 길지(吉地)라고 한다. 과거 신한은행과 구 조흥은행이 통합을 추진할 때 구 조흥은행 본점 자리로 통합은행 본사를 두자고도 논의가 됐었으나 그보다 더 운이 좋다 하여 남대문 부근 현재 자리를 그냥 통합은행 본점 자리로 쓴다고 한다.

   
SBJ은행은 신한은행의 일본 현지 법인으로 출범 1년만에 경이적인 성과를 거둬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같은 속설을 진지하게 논할 것은 아니나, 재운이 따라준 것은 과거 신한의 모태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는 관서흥은 등에서부터 이어져 왔다고도 할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현재 이 터는 일본 신한은행(SBJ은행)의 경쟁자격으로 교포 금융시장을 쟁탈하고 있는 긴키산업신용조합(近畿産業信用組合)이 쓰고 있다.

그나마 다행은 이 건물 역시 교포 경제인이자 세계 최고 서비스를 자랑하는 MK택시 설립자 유봉수 회장이 오사카흥은에 이어 긴키산업신용조합을 운영하면서 교포 은행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 신한은행의 오사카지점은 이 위치와는 다소 떨어져 자리하고 있다. 번듯한 일본 현지 리소나은행 건물의 3층에 자리해 시내 번화가를 내려다 보고 있는 일명 스카이점포다. 그래도 터를 차지하지 못해 서운하지 않으냐, 하다못해 보다 옛터에 가까운 곳에 오사카 지점을 트고 싶지 않았는가를 묻는 기자에게 신한은행 오사카 지점 관계자는  “그래도 일본 상도의로는 경쟁업자라도 마주보고 장사하지 않는다고 해 이를 존중했다”는 말로 에둘러 마음을 표시했다.

다만, 일본 신한은행은 지난한 과거 고난의 역사와 간난신고를 이기고 저금을 해 오사카흥은과 관서흥은을 키워준 교포들의 마음을 기리고자, 옛터 부근에 큰 옥상 전광판을 세워 야간에도 빛을 내고 있다.

남대문에서 신한은행이 1982년 개점할 때 초라한 시작에 걸맞지 않게 밀려든 교포들의 성원은 이렇게 초라한 터에서 시작됐지만 지금은 국내 굴지 은행을 넘어 세계 금융시장을 상대로 한국의 금융저력을 보여주고 있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일본 오사카= 이종엽 기자 lee@newsprime.co.kr, 임혜현 기자 tea@newsprime.co.kr

* 다음 편에는 신한은행 오사카 지점장 인터뷰를 통해 신한은행의 일본내 위상과 현지 전략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