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Z EZViwe

신한은행 ‘무지개 꿈’ 실현한 집념의 원동력은

[현지 취재] 금융계의 신화, 신한Way를 답하다 - 上

이종엽·임혜현 기자 기자  2010.12.13 13:43:40

기사프린트

[프라임경제] 2010년은 우리 역사에서 많은 의미가 있는 해이다. 그 중 한민족사에서 씻을 수 없는 35년간 일제 침략 강점은 우리 근현대사 전체를 뒤 흔들었다는 점에서 현재와 미래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해방 후 남북으로 갈라진 상태에서 해외에 남은 재외동포들의 삶은 힘 없는 민족의 설움 속에서 오로지 생존 의지로 버티면서 조국과 민족 발전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지금의 10대 경제 강국을 만드는 초석을 만들었다.

   
신한은행의 전신인 오사카흥은은 재일동포 거류지인 쓰루하시 역 일대 무허가 시장에서 태동했다. 사진은 현재 쓰루하시 역 시장 일대.
그 중 가장 큰 역할을 한 곳은 일본으로 재일동포들은 핍박 속에서 강한 정신력과 타고난 근면성을 유일한 재산으로 삼아 대한민국을 경제 강국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신한은행은 바로 이러한 재일동포들의 피 눈물의 역사이자 결실이다. 무허가 재래시장에서 시작해 국내 최대은행으로 비약적 성장을 이룬 신한은행의 태동과 성장을 총 3회에 걸쳐 다뤘다.

그런 의미에서 ‘금융계의 신화, 신한Way를 답하다’의 답은 두 가지 뜻이 있다. 걷다, 밟고 간다(踏)는 의미와 대답하다, 해답하다(答)의 뜻이 바로 그것.

일본 현지 취재를 통해 신한은행이 우리 경제계는 물론 국민들에게 주는 교훈을 답해보겠다.

◆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윗의 지략

2002년 연말, 은행계는 남대문로發 뉴스로 크게 술렁이고 있었다. 남대문로 신한은행, 더 크게는 신한금융지주의 조흥은행을 인수 합병안이 구체적으로 밑그림을 완성해 나가고 있었던 시기다.

이미 이전부터 무서운 성장세로 시선을 끌어온 신한이었지만, 당시 20년짜리 은행이 ‘조상제한서(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은행 등 5대 은행을 가리킴)’ 중 으뜸인 100년 역사 조흥은행을 인수하는 순간이 현실로 나타나자 은행계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당시 국내 금융권은 크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1997년 연말 발표된 IMF 구제금융 신청으로 당시 많은 기업과 국민들이 고통의 시간을 감수해야 했다. 관행에 안주해 있던 우리나라 은행계 역시 미국식이 주가 되는 선진금융체제에 발맞추기 위한 노력을 강요당하는 동시에, ‘채권은행단’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부실 거래 기업들을 정리, 회생시키는 데 ‘해결사’로 차출됐다.

이 시기 많은 은행들이 넘어졌고, 5대 은행 중 상당한 은행이 부실은행의 멍에를 쓰고 우리은행으로 합쳐져 사라지거나, 해외에 매각돼 본명 앞에 외국식 코드를 붙이게 됐다. 다만, 이때 살아남은 은행들은 한숨을 돌리면서 금융권 재편의 강력한 새 선두주자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됐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이 우량은행간 합병이라는 축복을 받았고, 단자사로 출발한 하나은행이 서울은행을 인수하는 행운을 누린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가장 드라마틱한 은행계 질서 재편 스토리로 많은 이들은 신한은행의 조흥은행 인수를 꼽는다. 1982년 7월 7일, 영업점 1개의 초라한 체격으로 시작한 신한은행이 어느새 성장, 선진시스템인 금융지주사 제도 하에 계열사들을 정렬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내 은행의 효시이자 순수민간민족자본이라는 자긍심에 빛나는 조흥을 새 파트너로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는 오랜 노하우와 탄탄한 우량 고객망을 갖춘 조흥을 삼켜도 더 이상 뒤탈이 없을 정도로, 국내 금융권의 절대 강자로 불쑥 커 버린 신한의 위상과 저력을 방증하는 대목이었다.

   
1982년 7월 7일, 민간자본에 의한 최초의 시중은행인 신한은행이 설립됐다.

◆ 망한 백화점 터에서 ‘재일교포의 염원’ 싹 틔워

신한은행은 재일교포들의 비원(悲願)이 맺은 결실이다. 식민 치하의 갖은 핍박과 광복 이후에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 남을 수 밖에 없었던 체념은 재일교포 1세대들에게 강인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가진 것이 맨손바닥으로 시작한 데다 기본적으로 일본 경제계의 서자였던 이들은 광복 이후에도 지하경제 단속이라는 명목으로 백안시하는 일본 당국의 구박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이후 60,70년대를 거치면서 간난신고 끝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교포들이 늘어갔다.

이들은 재일교포들이 한층 도약하기 위해서는 지렛대 역할을 해 줄 민족 은행이 필요하다는 열망을 갖게 됐고 대판흥은(大阪興銀), 관서흥은(關西興銀) 등으로 대표되는 많은 실험적 민족 금융기관을 성원했다. 그러나 일본 금융 당국은 기본적으로 이 같은 금융기관들이 시중은행으로까지 성장하는 것을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아울러 한국 정부는 경제 개발에 나서면서, 재일교포들의 모국 투자를 독려했다.

이에 따라 재일교포들의 힘으로 만든 금융기관의 열매를 맺고자 하는 염원과 함께, 모국에 투자하는 재일교포들의 편의를 도모할 금융기관 필요도 높아졌으므로, 본국에서의 은행 설립이라는 새 공감대가 형성됐다.

지금도 신한금융 빌딩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재일한국인본국투자협회가 이때 간판을 내걸었고, 일본에서 대판흥은과 관서흥은 설립으로 금융 노하우를 축적해 온 신한은행 이희건 명예회장이 그 구심점을 맡게 됐다.

이 회장은 먼저 단자사인 제일투자금융(주) 설립(1977년 8월 10일 영업 개시)과 이후 경영 능력 발휘(새서울상호신용금고 인수 등)로 교포들과 일반 국민, 당국의 긍정적 평가를 쌓아나갔다.

이후 은행업 진출을 위해 교민은행 설립을 위한 청원서를 제출하고 초조하게 답을 기다리던 1981년 5월, 드디어 정부는 재일한국인본국투자협회(당시 협회 회장 이희건)에 긍정적 답변을 하게 되고, 그해 7월 20일 교민은행 설립 발기인 대회가 열렸다.

현재 롯데그룹을 일군 신격호 회장 등 19명의 재일교포 기업인들이 발기인으로 나섰으나, 적절한 건물을 마련하는 데 애로를 겪던 중 폐점 상태에 있던 옛 코스모스 백화점 빌딩에 둥지를 틀고, 1982년 7월 7일 신한은행 창립기념식을 치르게 된다.

   
신한은행 이희건 명예회장은 재일동포 사회의 큰 기둥이자 한국 금융계를 변모 시킨 주역으로 손꼽힌다.
◆ 은행 패러다임 바꾼 새로운 시스템 도입

이같이 새로운 은행이 닻을 올리고 출항하는 과정은 쉽지만은 않았다. 이미 1981년부터 한일은행(우리은행의 전신)이 민영화되는 등 금융시장 선진화를 위한 정부의 고심이 깊었지만, 금융‘기관’이라는 표현이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관치금융 체질에 젖은 은행계의 사정은 하루아침에 개선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외환은행 출신으로 새 은행의 초대행장으로 영입된 김세창 씨는 이런 한국 은행계의 실정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외환은행 뉴욕지점장으로 외국환업무와 국제마인드를 갖추었던 김 초대행장은, 당시 첫 걸음마를 시작한 증권거래소로 자리를 옮겨 전무이사로 일한 경험도 갖고 있어 앞으로 금융시장은 고객 지향적이고 글로벌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음을 내다볼 줄 아는 인물이었다.

오사카에서 독학으로 대학을 마친 후 자수성가를 하며 교포은행의 구심적 역할을 해온 이 명예회장과 미래 금융의 청사진을 갖춘 김 초대 행장 등을 필두로 한 은행 지도부는 금융기관의 구습을 답습하지 않고 높은 은행 문턱을 허물자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런 한편 기존 은행들이 쌓아놓은 진입장벽을 허무는 것도 필요했다. 다행히 신한은행 창립 준비 단계에서 진행된 경력 및 신입 공채에서는 기존 은행들의 인사 적체와 층층시하의 엄격한 피라미드식 직장문화에 염증을 느끼면서 새 은행에 미래를 걸어보려는 우수 인재들이 많이 지원했다.

이 같은 인적 자원상을 정립, 인력을 확보한 다음에는 적극적이고 저돌적이되 고객에게 친절한 은행 직원으로서의 직업관을 형성하는 한편, 출신 성분에 구애받지 않고 ‘신한인’으로 화학적 융합을 하도록 할 필요가 제기됐다.

그 결과 도입된 것이 워크숍 활성화와 맹폐(猛吠), 그리고 적극적 영업 정신 함양이었다.

신한은행 직원들이 ‘동전수레’를 끌고 작은 점포들을 돌아다니자 은행계는 경악했다. 물론 상인들로서는 동전을 수시로 다량으로 필요로 하므로 이 같은 배려가 고마웠겠으나, 기존 은행계 분위기에서 보자면 ‘은행원’이 ‘동전수레’를 끌고 다니며 영업 기반을 닦는다는 게 상상도 못할 일에 가까웠다.

전단지를 돌리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시내에서 단체로 구보를 하는 등, 은행계의 정형화된 이미지에서 벗어난 행보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은행이 생기면서 은행 문턱이 한층 낮아질 것 같다는 느낌을 국민들에게 심어나갔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맹폐라는 독특한 정신교육 시스템. 단병접전(單兵接戰)으로 맞붙어 돌파하는 무사훈련 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평을 듣는 맹폐는 일단 한 번 ‘링’에 서면 절대로 상대에게 밀리지 않는 정신을 함양하도록 했다.

“자신 없으면 나가!”, “못 나가 네가 나가!”, “싫어! 안 돼!” 등등 셔츠 팔뚝을 걷고 허리에 손을 얹은 채 2인이 고함을 맞질러 대는 이 같은 교육은 극한의 투기 종목 등에서 정신력과 체력을 기르도록 몰아붙였던 것과 유사하다.

침이 튀고 정신적 충격으로 자기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는 치열한 대결은 때로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는 탈락자를 내기도 했지만, 진입장벽을 뚫고 새 시장을 개척할 필요가 있는 신한은행에서는 큰 효용을 발휘했다. 아울러 이 같은 맹폐는 워크숍 활성화와 맞물려 ‘끝장 토론’식의 활발한 토론문화가 자연스레 자리잡는 데에도 기여했다.

훗날 신한의 독특한 직장 문화를 연구한 어느 교수는 ‘신한뱅크웨이’라고 명명하였고, 이는 오늘날 ‘신한웨이’로 불리고 있다.

초기 투자를 아끼지 않은 첨단 전산망 구축 등의 하드웨어적 요소에 강인한 소프트웨어(인적 자원)를 겸비한 신한은행은 창립 초기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창립 첫날, 본점 영업점 1개로 시작한 초라한 개점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개점 준비 상황부터 신한은행원들의 노력을 눈여겨 본 국민들은 1만7520명이나 내왕해 총 5017계좌를 개설(당시 돈으로 357억4800만원)하는 등 신한은행이 순조롭게 출항, 항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일본 오사카= 이종엽 기자 lee@ ·임혜현 기자 tea@
 
* 다음 편에는 신한은행의 모태가 되는 오사카 일대를 중심으로 재일동포들의 은행 설립 과정과 현재 위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