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일촉즉발 상황까지 치달은 ‘환율 전쟁’의 불을 간신히 끈 G20 서울 정상회의. 이번 G20에서 일본은 미국과 함께 큰 이익을 보지 못한 국가로 평가됐다. 일본은 당초 미국 및 유럽과 공조, 중국의 위안화 절상을 압박할 방침이었지만 9월 엔고를 막기 위해 외환시장에 2조엔대의 대규모 개입을 한 뒤 국제사회의 비판의 표적이 되면서 명분을 잃고 수세적 상뢍으로 전환했다. 결국 중국의 슈퍼파워 부상과 이로 인한 발언권 강화에 끌려 다니며 예전같지 않은 경제력을 실감했다는 평이 나왔다.
하지만 정작 일본의 세계 경제 정책의 주요 초점은 이미 서울 회담장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쏠리고 있었다는 풀이도 나온다. 서울 정상회의에 앞서 열린 10월 경주 G20 경제장관 회의에서 이미 서울 선언의 대강의 기조와 방향, 그리고 각국의 이해득실 예상치는 대강 윤곽이 나온 것이 사실이다. 중국과 미국의 다툼에서 일본은 이미 뒷전일 수밖에 없는 ‘G2 시대’가 명확히 도래했음을 확인한 이상, 환율 전쟁의 세부 조율에만 매달리지 않았다는 해석이다.
일본은 그간 거리를 뒀던 태평양 연안국가 9개국의 ‘환태평양 자유무역협정(TPP)’ 구상에 한 걸음 다가서는 전향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당초 싱가포르, 뉴질랜드, 칠레, 브루나이 등 4개국이 시작한 환태평양 협정은 FTA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2015년까지 원칙적으로 모든 관세를 철폐하는 걸 목적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과 호주, 페루, 베트남, 말레이시아까지 포함한 9개국이 2011년까지 협상을 타결할 방침이어서 미국 주도의 환태평양 경제권 형성이 예상되고 있다.
◆‘환태평양을 일본 시장으로’ 구상 갑자기 주목하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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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미국과 중국 사이의 이른바 G2 구도가 굳어지면서 일본은 자존심이 극히 구겨진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한편 일본 경제의 저력은 여전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일본의 간 나오토 총리는 이 구상에 주목하고 있다. 당초 ‘원칙적으로 모든 관세 철폐’라는 협의 골자 때문에 농업 분야의 반발과 야당의 반대를 일본 내각은 의식, 신중하게 움직였지만, 9일 각의에서 ‘정보 수집을 위한 관계국과의 협의 개시’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TPP 지침을 결정, 사실상 참가 의사를 굳혔음을 시사했다.
지난 10월 말 ‘경주 선언’을 거치면서 사실상 G20과 여기서 논의할 국제 경제 시스템에서의 일본의 위상과 한계, 이해득실과 운신의 폭을 판단한 뒤 다음 포석으로 이같은 대규모 지역 경제 협력망 가입을 서둘렀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이번 서울 G20 서울 정상회의 직후 일본 미즈호 종합연구소의 야노 가즈히코 경제조사부장은 “통화 평가절하 경쟁을 둘러싼 현재의 갈등은 쉽게 해결할 수 없고, 단기적으로 각국이 만족할 만한 최선책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앞으로도 몇 가지 방향성에 대해 대체로 합의하면서 어떻게 하면 세계 경제의 회복을 지속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 탐색해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야노 부장의 전망이다. 이같은 전망은 일본이 환율 전쟁 해소는 결코 쉽지 않으며, 현재의 엔고 상황을 상당 기간 감수하더라도 이익 창출이 가능한 구조 마련에 G20 외의 방법론을 모색할 필요가 높다는 두 가지 전제를 이미 인식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으로 읽힌다.
◆韓 공세적 FTA 체결과 대중화경제권 물결에 ‘견제구’
일본은 한국 및 중국과의 FTA가 속도를 내지 못하면서 TPP에 관심을 돌렸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일단 불발로 끝났지만, 한국과 미국이 FTA 체결을 위해 협상을 계속하고 있는 것도 자극제다. 일본이 다른 시장 개척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만모한 싱 인도 총리와 간 나오토 일본 총리는 지난 10월 말, FTA의 일종인 경제동반자협정(EPA)에 서명했고, 이번 TPP를 통해 본격적으로 ‘제 3의 개국’(에도 말기 개국과 2차 대전 이후 경제 부흥에 이어 제 3의 활로 모색이라는 점에서 일본 일각에서 최근 즐겨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에 물꼬를 트겠다는 방침으로 읽힌다.
TPP 참가 예상국가들의 면모를 보면 사실상 아세안과 APEC을 혼합한 듯한 구성임을 알 수 있다. 아세안은 10개국을 다 합쳐도 한국 정도에 불과한 경제 블럭이라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중국이 아세안과 올해 FTA을 체결한 점이 일본을 자극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중국의 2009년 대외 직접투자액 565억3000만달러 중 404억달러(71.4%)가 아세안과 중동지역에 투자됐다는 점은 ‘대중화경제권’을 추진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환차손 커도 일 경쟁력 여전, TPP 얹으면 능률 상승
일본 경제는 현재 엔고 현상으로 크게 우울한 분위기다. 일본 엔화가 ‘안전자산’으로 부각되며 강세를 이어가고 있는데, 그 반작용으로 일본 경제는 수출경쟁력 약화로 큰 타격을 입는다는 비명이 일찍부터 나오고 있다. 지난 여름 이케다 모토히사 재무부 차관이 “일본은 경제 성장세를 유지하기 위해 과도한 엔화 강세를 피하기를 바란다”고 우려를 표명했을 정도다.
하지만 일본 산업계의 속사정을 들여다 보면 ‘위기’라는 해석이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글로벌 경제위기 여파로 선진국 경제가 얼어붙고 엔화 강세까지 겹치자, 고가 제품 수출에 주력했던 일본 기업들의 타격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 환차손이 극심했고, 삼성전자가 내노라 하는 일본 가전 메이커들을 앞서는 실적 성적표를 거두는 등 경쟁자인 한국 기업이 약진했다.
다만, 이 같은 ‘시련의 계절’ 수면 하에서는 일본 기업들의 반격 움직임이 존재한다. 파나소닉의 2010회계연도 상반기(올해 4∼9월) 영업이익은 작년 같은 기간의 6배인 1689억엔에 달했고, 순손익은 작년 적자에서 747억 엔 흑자로 돌아섰다. 소니의 경우도, 2009년 4∼9월 582억엔의 영업손실과 634억엔의 순손실에서, 금년도 같은 기간 영업이익 1356억엔, 순이익 568억엔을 올리는 등 개선 조짐이 보인다.
엔고라는 초강력 악재 아래서서도 일본 기업들의 저력이 죽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일본 정부와 경제계의 국제경제 상황과 엔고에 대한 대책이 ‘만만디’ 분위기로 바뀌는 것도 이같은 저력이 뒷받침되는 데 따른 자신감의 발로가 아닌가 주목할 시점이다.
미 경제지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9일 일본 정부가 엔고 기조를 역이용해 자국 기업에 해외 기업이나 자산을 인수하라고 촉구하고 나섰다고 전했다. 외환 시장 개입을 통한 엔고 저지에 힘을 쏟던 일본 정부 방침 변화를 미 언론이 주목한 것이다. WSJ는 일본 정부가 해외투자 쪽으로 정책 방향을 돌린 것은, 그간의 노력이 효과적이지 못했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엔고를 막을 수는 없지만, 각종 해외 자산 인수와 기업 합병(M&A) 등을 통한 기반 확대의 기회로 역이용하자는 공감대가 일본 식자층에서 퍼지고 있다는 뜻이다. TPP는 이와 같은 해외 개척의 방법론 중 가장 큰 규모에 해당하는 방편일 뿐으로 읽힌다.
◆한국 엔고 반사이익 곧 끊기고 日 주도 블록 ‘왕따’ 쓴맛 가능성
이런 상황에 자극받은 듯 우리 정부도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APEC 정상회의 참석차 방일한 자리에서 TPP 참여를 검토하겠다는 발언을 했다고 아사히신문이 보도했다. 하지만 TPP에 이전에 이 관련 지역 국가들과의 경제 교류망이 만족스러울 수준이 아니었다는 점은 참여 쪽으로 결론이 나더라도 일본처럼 그 과실을 전적으로 수혜하기 어려울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아세안과의 외형적 및 정서적 교감은 아직 주요 무역시장에 비해서는 일천한 것으로 풀이되며, 아세안 주요 3개국에 시장 개척단을 무역협회가 금년 6월에 파견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
이처럼 일본 경제가 엔고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는 데 실망하지 않고 영향권을 환태평양 지역으로 넓히면서 대중화경제권 형성 저지에 나서는 등 무역 지형을 본격적으로 바꿔 난관을 타개하려는 상황에 우리 경제는 이 파급효과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엔고가 이어지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원화 역시 향후 강세를 탈 것으로 전망된다. 원화의 지속적인 강세 때문에 갈수록 엔고에 따른 반사이익이 현저하게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으로부터 자본재 수입이 많은 우리로서는 수입제품 가격 부담도 같이 안게 되는 이중적 상황에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일본이 우리가 미처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 못한 시장을 블록으로 형성, 미국과 독식하게 되면 한미 FTA 타결 등이 가져올 이익보다 극심한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최대 수출 경쟁국의 통화인 엔화 가치가 사상 최대치로 올라 국내 수출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높다는 도식만으로 이해하기에는 상황이 복잡하다는 것이다. 금융시장에서도 엔고라는 특수한 상황이 뒷받침해 주기 때문에 미국의 초강력 양적 완화 정책으로 인한 한국 등 아시아 각국의 유동성 상승 상황이 우리 금융시장에서 어느 정도 저지될 것이라는 풀이에도 변수가 생길 수 있다. 현재 많은 외국계 자금이 들어온 상황에서 ‘외국인 주식 매수로 인한 환율 하락→한국 기업의 수출경쟁력 약화→기업의 수출경쟁력 약화를 우려한 외국인의 주식 매도’로 이어질 가능성은 아직은 낮지만, 엔고로 인한 효과보다 원화절상의 부정적 파급력이 큰 경우 경쟁력 약화 카테고리로의 이행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
이번 일본의 TPP 적극 모색은 이런 점에서 환율 전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측면을 근원적으로 풀이하려는 일본의 구상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며, 일부 해외 경제학자들이 우려하는 대로 경제블럭화 현상이 심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엔블럭’ 형성으로 실현될 가능성마저 담는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G2 중의 하나로 급부상한 중국과 경제 저력을 바탕으로 시장 확대에 나서는 일본 사이에 샌드위치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