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국내 대기업들은 대내외 경제 상황과 경영 방향에 따라 성장을 거듭하거나, 반대로 몰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기업일지라도 변화의 바람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2, 3류 기업으로 주저앉기 십상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선택’과 ‘집중’을 요구받고 있다. 국내 산업을 이끌고 있는 주요 대기업들의 ‘선택’과 ‘집중’을 조명하는 특별기획 [50대기업 완벽 대해부] 이번 회에는 롯데제과를 조명한다. 그룹의 태동과 성장, 계열사 지분구조와 후계구도 등을 두 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1967년 자본금 3000만원으로 태동한 롯데제과는 롯데의 모기업이다. 창립 42년을 맞은 지난해 약 1조3500억원의 매출을 달성하는 등 부동의 업계1위를 유지하고 있다.
신격호 회장은 1922년 경상남도 울산에서 5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무일푼으로 일본에 건너갔던 신 회장은 와세다고등고업학교(현 와세다대학 이학부) 재학 시절, 아르바이트생으로 잠시 인연을 맺었던 하나미쓰(和光)라는 60대 노인으로부터 5만엔을 투자받게 된다.
[사진=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 |
생각지도 않은 스폰서의 출현에 신 회장은 공장을 설립했지만 본격적으로 가동하기도 전, 미군기의 폭격을 받아 불타버렸고, 이후 컷팅오일 생산공장을 설립했으나 또 폭격을 받는 등 불운이 겹친다.
◆일본 노인에게 빌려 쓴 5만엔 차용증
1945년 8월15일. 일본은 연합국 측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나지만 신격호 회장에게 남은 것은 하나미쓰 노인에게 빌려 쓴 5만엔의 차용증 뿐.
거액의 빚을 두고 일본을 뜰 수 없었던 신회장은 더욱 사업에 열중했고, 이내 기존에 발 담궜던 사업인 커팅오일로부터 세탁비누, 세수비누, 포마드, 크림 등 유지제품을 만들게 된다.
유지제품 사업은 대 성공이었다. 물자부족 시대였던 일본에서 유지제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덕분에 신격호 회장은 공장가동 1년 반 만에 5만엔을 모두 갚는 쾌거를 거둔다.
당시 패전국인 일본에는 미군이 머물렀다. 이들은 껌이나 초콜릿을 굶주린 아이들에게 나눠줬고, 아이들은 문명국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껌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더구나 미각을 돋우는 달콤한 껌은 일본에서 오랫동안 통제식품이었던 설탕을 대신할 훌륭한 기호식품으로 인기가 높아졌다.
이러한 시장 상황을 감안한 신 회장은 비누를 만들던 밥솥과 국수 뽑는 기계를 이용해 껌을 만들기 시작했다. 껌은 찍어내기가 무섭게 팔렸다. 껌을 팔아 떼돈을 번 신 회장은 자본금 100만엔, 종업원 10명의 법인 사업체 ‘롯데’를 만든다. ‘롯데’라는 명칭은 그가 문학에 심취했을 당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여주인공, 샤롯데에서 따왔다.
반면 1960년대의 한국은 최우선 정책으로 경제개발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제과업을 비롯한 대부분 산업체들 역시 낙후한 실정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일본에서 껌을 팔아 성공한 신격호 회장에게 모국을 위해 힘써달라고 요청한다.
신격호 회장은 제과업을 한국에 들여오기로 결정하고 국내에 롯데제과를 설립한다. 하지만 이때 주식 지분 문제로 신 회장의 첫 동생인 철호씨가 고소를 당하고 현 농심 회장이자 신회장의 넷째동생인 춘호씨가 대표권을 행사하면서 형제의 분란의 시작된다.
결국 철호씨는 캔디와 비스킷 부분을 떼내어 ‘메론제과’를 설립하고, 춘호씨는 ‘롯데공업’을 차려 라면시장에 진출한다. 하지만 춘호씨는 맏형에 의해 ‘롯데’라는 상호의 사용조차 거부당하면서 완전한 독립을 하고 (주)농심을 설립한다.
◆故 유창순 회장 필두로 괄목성장
[사진= 롯데제과 본사] |
한국 롯데제과 하나로 만족하기엔 야심이 컸던 신격호 회장은 롯데제과 사장직을 맡고, 초대회장직을 고 유창순씨에게 맡긴다.
평안남도 안주 출신인 유 회장은 1950년 9월 맥아더 사령부에서 찍어낸 한국 화폐의 운송 책임자로 선임됐던 인물. 이런 인연으로 이듬해 10월 한국은행 도쿄 지점장에 부임했다.
그는 이미 도쿄 지점에서 2년간 근무하며 신격호를 예금주로서 만난 바 있었다. 상공부장관,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하며 관·재·정계에 폭넓은 대인관계를 지닌 유 회장은 1967년 롯데제과 회장직으로 취임한 이후 14년 동안 롯데 성장에 기여한다. 그 뒤 15대 국무총리, 전국경제인연합 회장 등을 지냈다.
유 회장은 회사의 전반적인 진로, 자금의 안배, 대외적 업무를 맡았고, 신격호의 막내 동생 준호씨는 기획실장이 돼 제조, 판매, 영업, 인사를 총괄했다.
故 유창순 회장을 필두로 롯데제과는 1971년 껌 국내 생산을 개시했고 창립 6년만인 1973년 기업공개(자본금 13억2241만원) 및 상장을 한다. 당시 발행가 500원이던 주가는 2010년 11월 현재 국내 최고가인 130만원대를 유지하고 있다.
롯데제과는 제과업계 빅3(롯데, 오리온, 해태) 중 가장 늦게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창립 11년만인 1978년 제과시장 정상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멜라민 파동에 롯데제과 고공행진 ‘주춤’
그러나 글로벌 기업으로 승승장구하려던 롯데제과의 발목을 잡는 사건이 터진다. 바로 지난 2008년 9월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됐던 멜라민 파동. 중국정부가 롯데제과의 중국 현지법인인 롯데차이나푸드가 제조한 ‘슈디’에서 기준치를 초과한 멜라민이 검출됐다고 발표했다.
롯데제과는 해당 제품은 중국에서만 판매되고 있다고 해명했다. 해당 제품과 같은 공장에서 생산한 ‘애플쨈쿠키’, ‘딸기쿠키’를 수거한다고 발표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 했지만 3개월도 지나기도 전, 중국 현지 생산한 제품을 섭취한 어린이 2명이 신장결석을 앓는 사태가 발생한다.
중국발 멜라민 파동이 지속되자 국내서도 멜라민 공포가 확산됐고 롯데제과는 기업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은 사실상 롯데제과 내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다.
그럼에도 멜라민 파동이 잠잠해진 2009년 2월 롯데제과는 최대 실적(매출 1조2447억원)을 기록했다. 이런 성장세를 이어 같은 해 12월 롯데제과는 799억원에 호빵과 쌀과자가 주력 제품인 기린을 인수하며 쌀 과자뿐 아니라 양산빵 시장 강화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된다.
◆아시아 NO.1그룹 도약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롯데제과는 해외 시장 진출을 기반삼아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2002년 제과업계 최초 매출 1조원을 달성한데 이어 2004년에는 인도 현지법인 설립했다. 이를 시작으로 베트남, 러시아, 중국 등 브릭스(VRIC’s) 국가에 공격적 진출을 단행했다. 또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태국 등 동남아 신흥시장은 물론 미국까지 현지법인을 늘렸다.
글로벌화에 가속도를 내기 위해 유럽 시장을 공략한 가운데 블루오션으로 점쳐진 초콜릿 시장을 목표로 2008년 8월 벨기에 길리안 사까지 인수했다. 이는 유럽의 벽을 넘은 것 뿐 아니라 글로벌화 서막을 알린 계기로 평가되고 있다.
롯데제과 본사는 창립 43주년 맞은 2010년초, 최첨단 시설을 갖춘 양평동 신사옥으로 이전했다. 롯데 신동빈 부회장은 매월 한차례 이상 이 곳을 방문하며 각별한 애정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 7월에는 롯데 신격호 회장이 찾는 등 롯데그룹의 상징적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김상후 사장은 이전 한 달 후인 지난 3월 “오는 2018년까지 국내 3조, 해외에서 4조5000억원의 매출을 달성해 글로벌 아시아 NO.1 그룹으로 도약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 사장은 “해외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현지인 입맛에 맞는 제품을 만드는 게 기본”이라며 “빠른 해외 시장 공략을 위해 5~6개 해외업체 인수합병(M&A)를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일환으로 롯데제과는 지난 10월 파키스탄 콜손 사를 200억원에 인수했다. 인수합병 외에도 인기 브랜드를 중점으로 마케팅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8년 3조 달성을 목표로 한 롯데제과가 우선적으로 2010년 매출 1조5000억원을 달성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또 프리미엄 시장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하면서 앞으로 국내 시장과 해외 시장에서 어떻게 성장해 나갈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