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국내 대기업들은 대내외 경제 상황과 경영 방향에 따라 성장을 거듭하거나, 반대로 몰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기업일지라도 변화의 바람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2, 3류 기업으로 주저앉기 십상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선택’과 ‘집중’을 요구받고 있다. 국내 산업을 이끌고 있는 주요 대기업들의 ‘선택’과 ‘집중’을 조명하는 특별기획 [50대기업 완벽 대해부] 이번 회에는 두산그룹을 조명한다. 그룹의 태동과 성장, 계열사 지분구조와 후계구도 등 두 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두산그룹은 국내 대기업들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 박승직 두산 창업주는 1864년 6월 22일 박문회 공과 정정숙 여사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기도 광주에 적을 둔 그의 부친은 남의 밭을 부쳐 먹던 소작농이었다. 박 창업주가 열아홉 어린 나이에 보따리 장사를 하며 기를 쓰고 돈을 번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박승직 두산그룹 창업주 |
동대문과 종로일대서 ‘배오개 거상’이라 불리며 승승장구하던 박 창업주에 시련이 찾아왔다. 1905년 일본에 의해 화폐정리가 시작되면서 조선돈 가치가 뚝 떨어진 것이다. 물론 면직물 포목시장도 점점 경쟁력을 잃어갔다.
◆남편 못지 않는 사업수완
박 창업주가 재기에 성공한 데는 그의 부인 정정숙 여사 도움이 컸다. 1915년 정 여사가 부업 삼아 분 기술자 3명을 고용, 재래식 분을 근대적으로 포장해 판매한 게 ‘대박’을 터트린 것이다.
일제 화장품이 판을 치던 1916년 정 여사는 국내 최초로 ‘박가분’ 백분을 내놓았다. 국산으로 제작된 박가분은 수입산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고 미백 효과도 뛰어나 하루 5만갑 이상 불티나게 팔렸다. 어엿히 박승직상점 히트상품으로 거듭났다. 1925년 박승직상점이 주식회사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도 박가분 효과가 컸다.
정 여사만큼이나 맏며느리 명계춘 여사의 사업수완도 뛰어났다. ‘남의집살이’도 해봐야 된다는 선친의 뜻에 따라 남편 박두병 초대회장이 조선은행에서 3년 간 근무했던 게 계기가 됐다. 명 여사는 중고 미제 승용차 2대와 일제 트럭 2대를 구입해 운수업에 손을 댔다. 승용차는 시내 택시용으로, 트럭은 장작을 실어 나르는 데 투입됐다. 이 사업은 훗날 두산상회 토대가 된다.
2세 체제가 시작된 것은 1936년 장남 박두병 초대회장이 박승직상점 취체역(지금의 상무급)으로 취임하면서부터다. 그러나 박승직상점은 이듬해 납 파동으로 한차례 곤욕을 치르게 된다.
분을 많이 사용하던 기생들 사이에서 피부가 점점 파랗게 변하기 시작하고 정신이 혼미해 지는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한 것. 화장 부착력을 높이기 위해 주원료로 사용했던 납이 문제였다. 심지어 박가분으로 인한 납 중독에 걸린 한 기생은 이 박가분을 먹고 자살시도를 했다. 이로 인해 박가분은 1937년 생산을 전면 중단하고 만다.
▲1896년 8월 1일 박 창업주는 국내 최초로 서울 배오개에 두산그룹 모태인 박승직상점을 차렸다. |
두산상회로 이름이 바뀌면서 두산의 현대사가 시작됐다. 8·15 광복은 두산이 대형화되는 도약대 역할을 톡톡히 했다. 미 군정청은 한국내 일본인 재산을 처분하면서 쇼와기린맥주 관리인에 박 초대회장을 지명했다. 박두병은 이미 1942년부터 쇼와기린 대리점을 운영해 온 터였다. 1948년 회사 이름을 동양맥주로, 상표는 OB로 바꿨던 그는 미 군정청이 물러날 때 동양맥주를 34억원에 사들였다.
두산이 또 한번 도약한 것은 1960년대 들어서다. 박 초대회장은 두산상회 이름을 두산산업으로 바꾸고 계열사 설립 및 인수합병에 박차를 가했다. △1960년 동산토건(현 두산건설) 설립 및 합동통신사 인수 △1966년 한양식품(코카콜라 제조) 설립 △1967년 윤한공업(현 두산기계) 설립 등 그룹외형은 꾸준히 확대됐다. 이후 두산은 소비재 산업, 무역과 건설업 등을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중공업그룹으로 재도약
1960∼70년대 고도성장과 중동건설 특수 등에 힘입어 거침없는 성장세를 이어온 두산은 그러나 199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휘청거렸다. 식품·출판·건설·기계·전자 등 과도한 사업다각화 속에 주력기업인 동양맥주가 조선맥주(현 하이트맥주)에 추월당해 적자에 빠지는 등 사업부진이 계속됐다. 1995년 그룹 적자규모는 9000억원, 부채비율은 625%나 됐다.
▲두산그룹 사옥 전경 |
1998년에는 그룹의 모태인 동양맥주를 벨기에 인터브루에 넘겼고, 그룹의 상징이었던 서울 을지로 사옥도 팔았다. 이 때문에 재계 일각에선 “두산이 이제 망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의 감량은 나중을 위한 힘의 원천을 비축하는 계기가 됐다.
대신 두산은 인프라 지원사업에 새롭게 눈을 돌렸다. 외부에서는 그들이 가업을 버리는 것은 ‘망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두산은 ‘구조조정만이 살 길’이라며 자신들 결단을 믿었다. 당시 박용곤 회장(현 명예회장)은 “두산이 다음 세대로 넘어가지 못할 수 있는 상황에서 가업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첫 출발은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인수였다. 그때 당시만 해도 소비재 사업을 하던 두산이 중공업을 맡을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대세였다. 그러나 두산중공업은 저수익사업이던 제철, 화공사업을 정리하고 발전, 담수 등 핵심사업에만 역량을 집중했다. 그 결과 2000년 매출 2조4000억원에 순손실 248억원이던 회사는 2008년 매출 5조7097억원에 영업익 4744억원을 기록, 우량기업으로 재탄생했다.
이후 두산은 고려산업개발(2003년), 대우종합기계(2005년)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중공업그룹으로 도약했다.
또 담수설비(두산하이드로테크놀러지), 발전소 보일러(두산밥콕), 친환경 엔진(미국 CTI), 소형 건설장비(밥캣) 등 원천기술을 확보한 외국 회사들도 차례로 인수, 보일러-터빈-발전기로 이어지는 ‘풀 라인업’을 구축했다.
이러한 두산의 변신은 성공적이었다. 구조조정을 진행하던 1998년 3조3000억원이던 매출이 2008년 20조원을 넘겼고, 영업익도 700억원에서 1조3700억원으로 훌쩍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