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세상에 걱정 없는 사람 어디 있으랴.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는 말에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사회생활을 하는 이에게 걱정, 근심은 옵션이 아닌 필수로 들고 다니는 필수품인지도 어언 옛날.
걱정과 근심을 모두 다 버릴 수 있다면 이미 해탈의 경지에 올라 더 이상 속세에 있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힘들다. 잠시만이라도 근심, 걱정을 잊을 수 있다면 그게 어딜까…
탁 트인 풍경, 그리고 사랑에 빠진 소녀의 발그레 물든 볼을 연상하는 단풍을 찾아 충북 제천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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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사의 가는 길에서 만난 단풍, 붉은색이 햇빛을 만나 더 짙어보인다 |
해발고도 1,016m의 금수산 자락 신선봉 능선에 있는 사찰로, 662년(신라 문무왕 2)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정방사. 대한불교 조계종 속리산 법주사의 말사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산방사로 소개되어 있다. 이 때문에 제주도 산방산의 산방사와 착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은 제천의 정방사라는 것.
어쨌든 이 사찰은 의상이 도를 얻은 후 절을 짓기 위하여 지팡이를 던지자 이곳에 날아가 꽂혀서 절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사전(寺傳)에 1825년 지금의 불당을 보수했다는 기록도 있다.
금수산 이곳은 얼음골로 더 유명하다. 지금은 얼음골이라는 말만 들어도 한기가 느껴져 오싹한데, 여름에는 얼음골이겠지만 가을에는 정방사가 단연인기다. 이유는 올라가보면 안다.
정방사까지는 걷지 않고 차로도 편하게 갈 수 있다. 하지만 진정 단풍을 느끼고 싶다면, 걷는 것이 정답이다. 차를 타고 금방 지나쳐버리는 단풍은 몇 분의 아름다움만 간직할 뿐이고, 걸으면서 만끽하는 단풍은 가을내내, 그리고 겨우내까지도 기억할 수 있는 지속성을 갖고 있다.
울창한 숲이 터널을 이루고, 그 터널 속을 나는 걷는다. 나무 사이사이로 햇살이 들어오고, 단풍잎은 햇살을 받아 반짝거린다. 지저귀는 새소리가 귀를 즐겁게 하고,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은 산들산들 가을바람이 식혀주고 있다.
절까지 가는 길은 그렇게 험하지는 않다. 하지만 낮은 산이라고 해도 산은 산이기에 오를 때 숨이 살짝 차오를 뿐이다. 하지만 오를수록 점점 경사가 지고, 내 숨소리도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쉬어갈까 하는 틈에 맑은 물이 내려오는 작은 계곡을 만났다. 어느새 떨어진 단풍잎들이 계곡을 메우고 있다.
맑고 투명한 물 위를 둥실둥실 떠가는 단풍잎.
어렸을 적 추억을 떠올리며 단풍잎 하나 주워들고 가방에 있는 책에 끼워넣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고, 땀을 닦다가 오른편 산을 바라보고 있자니 울긋불긋한 산 위로 하얀 무언가가 떠 있었다. 마치 새가 산에 잠시 앉아 쉬어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 돌계단만 오르면 정방사. 거의 다 왔다라는 안도감에 함께 들리는 어린이들의 소리.
“엄마, 나 저거 타서 가면 안돼?”
아이의 손가락은 사찰의 비품을 나르기 위한 레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애교도 이 절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결국 어린이들은 끙끙대면서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헉헉거리면서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자 법당보다도 더욱 반가운 것은 약수. 여행을 다니면서 그 지역 생수를 비롯해서 정말 많은 물을 마셨지만서도 산을 오르고 땀을 닦으면서 먹는 약수는 어떤 물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원하고 맛있다.
정방사 경내에는 법당과 요사, 현혜문 등이 있는데, 1825년에 세워진 법당은 12칸, 요사는 5칸 규모의 목조 기와집이다. 현혜문은 절의 정문으로 일주문이라고도 하고, 1칸 규모의 목조문이다.
법당 안에는 주존불인 높이 60cm, 어깨 너비 30cm의 관음보살상이 있으며, 불상 뒤로 후불탱화가 그려져 있다. 최근 법당 안에 신중탱화, 산신탱화, 독성탱화 등을 그려 넣었다. 법당 뒤의 웅장한 암벽은 그 크기가 법당의 3분의 1을 뒤덮을 정도다.
그리고 법당 앞에서 바라보는 청풍호의 경치. 지나가던 바람도 구름도 쉬어갈 듯한 경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곳에서 산과 호수를 바라보노라면 저절로 신선이 된 듯한 느낌이다.
울긋불긋한 가을 옷을 입고 있는 산을 바라보고, 투명한 하늘을 안아볼 듯 잠시 팔도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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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우소 |
이 정방사에서 꼭 들려야 할 곳이 있다. 용무가 있든 없든 간에 꼭 가야할 곳은? 해우소다. 근심을 푸는 곳, 번뇌가 사라지는 곳이 해우소가 맞지만 이곳의 해우소만큼은 자잘한 걱정을 비롯해서 크나큰 걱정과 근심을 다 놓고 갈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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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들어가면 모두가 선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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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남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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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우소의 스님 전용 칸 |
선남, 선녀만이 들어갈 수 있는 화장실. 아니, 스님칸도 특별히 따로 돼 있다. 이렇게 세 칸의 해우소는 “선남, 선녀”라는 글씨부터 독특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처음 화장실을 찾은 사람은 나란히 붙어있는 세 문을 보고 깜짝 놀란다.
정방사를 방문하는 이들은 선남과 선녀의 칸을 이용할 뿐인데, 각자 맞는 성을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가면, 탄성이 절로 나올 무언가와 대면한다.
들어갈 때는 선녀가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젓던 아주머니도 나올 때는 선녀의 미소를 띠는 참으로 신기한 화장실이 이곳의 해우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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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우소 안에서 만나는 절경 |
선녀와 선남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창문이다. 창문에서는 아까 법당앞에서 마주했던 청풍명월을 다시 또 만난다. 손 뻗으면 내 손 아래에 산이 있고 저 멀리 호수가 있다. 근심을 풀면서 멋진 경치를 감상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일석이조가 아닌가?
바람도, 구름도 멈췄다 가는 멋진 풍경을 감상하고 내려가는 길, 올라오면서 봤던 단풍이 잘가라고 인사를 한다.
더불어 코스모스까지 하늘거리면서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올 가을은 여느 가을보다도 짧고, 단풍도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반짝 가을단풍을 맞이하자마자 우리는 겨울 눈꽃과 인사를 해야할 지도 모른다.
이미 한라산에는 눈이 내렸고, 겨울은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우리 곁으로 오고 있다. 가을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붉은 단풍과 인사를 한번은 나눠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섭섭한 가을은 되지 않게 말이다.
가을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빨갛게 물드는 단풍과 부드러운 능선이 이어지는 산, 투명한 하늘과 솜사탕 같은 흰 구름을 만나며 근심, 걱정을 잠시라도 내려놓아 보자.
오늘만큼은 걱정은 아예 산꼭대기 해우소에 놓고 온 것이라 생각하고 말이다.
-정방사 : 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능강리
※ 여행 칼럼니스트 고연실은,
제주민영방송에서 구성작가로 활동해왔으며 한때 영화사에서 시나리오 작가로도 일했다. 현재는 여행이 무작정 좋아, 전국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비경들을 카메라에 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