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 수확의 계절 가을. 들판에는 오곡이 무르익어간다. 농부들은 들판에서 수확을 하느라 일손이 모자라 전전긍긍하지만, 내 마음 밭의 1년 농사는 제대로 해냈는지 살펴봐야 할 노릇이다. 들판이 온통 노란빛으로 물들어가고, 산도 울긋불긋한 갈색 옷을 입을 무렵의 제주도 들판으로 떠나보았다.
제주도, 그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곳, 황홀한 이름이다. 하지만 나는 제주도에서 태어나 20년 넘게 그곳에서 자랐고, 20년 넘게 제주도를 돌고 돌아 곳곳을 누비다 보니 제주도는 나에게 “평범”이라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중에는 제주도가 아닌 다른 곳으로, 전국을 무대로 여행을 다녔다. 하지만 막상 제주도를 떠나 대한민국의 북쪽 도심에서 제주도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곳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천혜의 아름다움을 가진 곳이 바로 그곳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번영로에서 만나는 은빛 억새물결
이제는 나에게 새로움과 깨달음을 주는 곳 제주도. 이 제주도의 동쪽과 서쪽, 어느 곳을 가더라도 지금 제주도는 은빛물결이다. 거친 바람에 반짝이며 흔들리는 억새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기 일쑤다. 서쪽 평화로와 동쪽 번영로 이 둘을 통해 억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나 가을에는 동쪽 번영로 (97번 도로) 로 갈 것을 권해본다.
은색 옷을 입은 제주의 억새 |
꼬불꼬불, 편도 1차로의 번영로를 지나가는 차는 그리 많지 않다. 도로 폭이 좁고, 차도로 왕복 2차로이기 때문에 그렇게 속력을 내면서 갈 수 없는 곳이다. 때문에 억새를 감상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번영로 근처 억새밭 |
지나는 곳곳마다 은빛물결로 출렁인다. 번영로 한 곳을 지나가다가 차를 세우고 들어갔다. 작은 오름 하나, 그리고 그곳에는 억새의 물결을 만날 수 있었다.
-삼나무 뒤에 숨겨진 하얀 메밀밭
다시 차를 끌고 나선다. 얼마 가지 않아 양쪽에는 큰 삼나무들이 나온다. 키 큰 삼나무들 때문에 뒤에 밭은 보이지가 않는다. 삼나무 뒤에는 무엇이 자라고 있을까?
제주도의 메밀맡 |
원래 삼나무는 감귤나무가 잘 클 수 있도록 바람을 막기 위해 심은 것이다. 감귤 나무가 삼나무 뒤에는 없는데, 그 뒤에는 어떤 농사를 지었을까 하는 호기심에 삼나무 숲 뒤를 가보면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러자 붓으로 흰색 물감을 톡톡 찍어 그려놓은 듯한 메밀밭이 보인다. 메밀하면 떠오르는 곳은 강원도 봉평, 이효석의 소설로 강원도 봉평은 메밀하면 떠오르는 키워드가 되었다.
삼나무 뒤에 펼쳐진 메밀밭 |
제주도에서의 메밀이라... 언뜻 생각하면 상상이 가질 않는다. 나무만 보았지 나무 뒤를 보려고 생각 조차 안 하기에 관광객들도, 제주도민들도 모르는 장소이기에, 이 메밀밭은 독특한 매력을 안고 있다.
메밀밭 뒤로는 오름들이 보이고, 키 큰 삼나무들이 그 뒤를 든든하게 버티고 있다. 든든한 삼나무들 덕분에 이 메밀밭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이렇게 이곳에서 자리잡고 있을 수 있었다.
-바람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인적 드문 도로
동쪽 번영로를 타고 계속 가다보면 어느덧 성읍민속마을에 다다른다. 민속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는 도로에서 슈퍼 하나를 끼고 왼쪽 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차 하나 간신히 갈 정도의 길이 나온다.
지나가는 차 한 대도 없는 한적한 도로 |
완만한 곡선의 들판이 양 옆으로 펼쳐지는데 나무 한 그루가 지나가는 사람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수수와 조가 자라는 이곳은 제주도에서 유명한 사진작가들이 사진을 찍으러 나오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정말 아는 사람보다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이곳은 아침저녁마다, 계절마다의 느낌이 다르다. 용눈이 오름을 사랑한 김영갑님의 어느 한 작품처럼 바람과 대화하는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나 역시 가끔 찾는 곳이다.
하늘과 바람의 대화 |
사람 하나 없는, 가로등 조차 없는, 비스듬하게 서 있는 전주만이 이곳이 길임을 알려주는 곳에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속삭이는 바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속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된다.
하늘과 바람과의 대화, 자연과의 대화란 진정 이런 것이리라.
-섭지코지 배꼽에 위치한 명상의 공간
동쪽으로 동쪽으로, 핸들을 돌리며 다다른 이곳은 섭지코지.
마치 광야를 연상케 하는 현무암들 |
그리고 이 섭지코지의 배꼽이라 불리는 곳에 높은 콘크리트 건물이 하나 들어서 있다. 세계적인 일본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디자인 한 건물이다.
물의 공간, 양 옆으로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
흑갈색의 현무암들이 무더기로 펼쳐져 있는 너른 마당은 돌의 공간, 마치 광야를 의미하는 것만 같다. 내 마음도 이렇게 너른 광야일 것만 같은데… 돌의 광야를 지나 억새가 하늘 거리는 바람의 공간을 지나 명상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마주친다.
얕지만 쉴 새 없이 흐르는 물 사이로 지나가는 물의 공간.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속성을 은유적으로 담아내기도 한 공간에서 나 역시 끊임없이 변화해야함을 느낀다.
촘촘한 담으로 마치 미로를 연상케 하는 구조 |
더더욱 깊숙히, 마치 마음 깊은 곳까지 닿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콘크리트 건물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면 진정한 명상의 공간에 다다른다.
은은한 조명의 지니어스 로사이 내부 |
어둠 속에 인공조명이 하나씩 길을 비추고, 이 빛이 비추는 길은 마음 깊숙한 곳까지 닿는 길이며, 존재의 근원에 둘러 접근하는 길이다.
지니어스 로사이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 |
'지니어스 로사이'라는 말은 '이 땅을 지키는 수호신'이라는 뜻이다. 지키려는 것은 섭지코지로 대표되는 제주의 자연이며, 자연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근원이기에 신성하다. 더불어 이곳에 있는 나도 고로 신성하다는 것...
제주의 메밀, 억새, 바람 그리고 명상의 공간까지. 마음 깊숙한 곳까지 나는 이르렀는가?
점점 깊어가는 가을.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지금은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볼 때다.
자연과 대화하며, 과연 나의 마음 1년 농사는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마음 농사가 풍년이든 흉년이든 생각 자체만으로도, 자연과의 교감하나 만으로도 내년 마음 농사는 잘 지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지 않을까?
-지니어스 로사이 :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127-1 휘닉스 아일랜드 안에 위치. 064-731-7000
-억새밭 : 97번 국도(번영로)를 따라 펼쳐져 있음
-메밀밭 : 성읍리 남영목장 근처
※ 여행 칼럼니스트 고연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