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오 기자 기자 2005.10.29 11:46:41
당시 신문에는 주식거래 시세등을 싣는 곳을 商況이라고 했다. | ||
그러나 중매인들은 경취주의 매입 매도 세력으로 나뉘어 이합집산하면서 실제 수급을 무시한 채 투기매매를 지속했다.
이런 가운데 그해 9월8일 개장후 처음으로 대규모 해약사태가 발생했다(지난주 한국증시 110년 4편 사진자료 참조).
경취주 매입을 주도했던 한 중매인이 자금 부족으로 계약이행이 불가능하자 매도측 중매인 두사람에게 해약하자고 요구,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주당 101원에 합의를 보고 매수를 없던 걸로 했다.
자금 규모를 감안하지 않은 무리한 매매가 이뤄진데서 보듯 당시의 경취주 급등은 비이성적인 것이으로 그러한 해약사태는 불과 20일 후인 28일에 또 나타나 증시에 상흔만 남긴채 1만5000주의 거래가 없던 걸로 돼버렸다.
대규모 해약사태 불구 경취주 급등 증권주 파동 잉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취주가는 이에 아랑곳 하지않고 상승, 9월8일 109원에서 27일엔 123원, 28일엔 127원으로 오른데 이어 30일엔 132까지 치솟으면서 8월의 전고점에 육박해 증권주 파동의 씨앗도 계속 커져갔다.
그해 10월3일 드디어 경취주의 매매를 둘러싸고 창립이래 최대규모의 수도(受渡)불이행이 일어나 휴장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조선 최초의 증권주 파동이 시작된 것이다.
경취주를 연일 매도해왔던 일부 중매인들은 3일에도 계속 매도에 나서 경취주 단기거래물은 전날보다 12원가량 폭락한 118원 90전에, 금주물(今週物, 옆사진 거래시세표 참조)은 16원 하락한 117원10전에, 내주물(來週物)은 17원 가량 하락한 116원30전에 전장 거래를 마쳤다.
이에 그동안 줄곧 매입 주문을 해왔던 매수측 중매인은 자금여력이 소진됨에 따라 증거금 납부가 어려워지자 고객보호란 명분을 내세우며 주당 112원에 해약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매도측 중매인들은 해약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이미 매도측 중매인들은 연합협정을 맺고 매입측 중매인들에 대해 집중공세를 퍼부었던 것이다(동아일보 1921.10.4).
4일에도 전날 사태와 연관된 수도 불이행사태가 계속 이어졌다.
4일 전장에서 중매인인 川崎良太郞은 전날 자신이 사기로 약정했던 경취주 1만7000여주의 60% 가량을 자기쪽 매입 중매인들에게 주당 110원에 떠 넘겼고 일반인들도 전날 휴장사태까지 몰고간 매도인측에 반발, 매수세로 돌아섰다.
이에 따라 전날 폭락했던 경취주가 이날에는 폭등세로 바뀌면서 매도인측이 80만원에 이르는 추가증거금을 납부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으나 이를 이행하지 못해 4일 후장때 다시 휴장되면서 사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돼버렸다.
총독부 은행권 출입기자단 조기수습 강력 촉구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 사장.경취주 파동시 중매인간 중재에 나 섰다. | ||
그러나 수도불이행 자금이 무려 274만5650원에 이른데다 양측의 이해가 엇갈려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이에 경취는 6일 후장부터 경취주를 뺀 나머지 주식의 거래를 재개했지만 거래가 잘 될 리 없었다.
경취와 경신(=경성증권신탁주식회사, 한국증시 110년 그 파동의 역사 4편 참조)에 대한 비난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18일엔 다른 주식의 거래마저 중단됐으며 이후 한달여나 휴장사태가 지속됐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물론 조선은행 식은(殖銀)등 은행권도 증시에 대해 금융지원을 중단하겠다고 경고하면서 조기 수습을 촉구했고 출입기자단도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압박했다.
이에 따라 경취는 ‘경취주결제조정위원회’를 만들어 수습에 나섰다. 10월말 문제의 수도불이행 자금 가운데 73만1970원을 매입측 중매인들에게 부담시키는 한편 중매인 전원이 신디케이트를 구성해 그 명의로 경신에서 201만3680원을 차입, 나머지 수도불이행자금을 결제하기로 합의했다.
경취주결제조정위원회 결성 수습나서
11월1일 중매인들은 경취 사장과 경신 사장 天日등이 참석한 가운데 중매인조합 총회를 열어 ‘신디케이트 조직에 관한 협정서'와 '수도이행각서’에 서명했다.
뿐만 아니라 식은 조선실업은행 조선상업은행등 은행권도 조선재계를 구제한다는 명분을 들어 경신에 결제자금을 지원하기로 했고 조선총독부도 이를 승인함으로써 11월7일 경신주를 제외한 모든 상장주식이 거래됐으며 11월 14일에는 경취주의 거래가 재개되면서 조선 최초의 증권주 파동은 간신히 수습됐다.
그러나 경취주의 거래가 재개된 후에도 경취의 거래량은 이전상태를 회복하지 못했고 이같은 현상은 12월까지 이어지면서 경취주 가격도 95원대까지 급락했다.
경취주 파동으로 인해 투자자들의 불신은 해소되지 않았고 경취주 하락으로 인해 담보주식 가치가 떨어지면서 경신 역시 자금여력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경취는 증시부양을 위해 경신의 증자에 나섰다.
증자성공으로 경신의 대출여력이 확보되면서 1922년 3월에는 경취주 거래가 늘고 주가도 일시 회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2년엔 경기가 침체한데다 당시 은행들이 8개상장사의 자본금 납입으로 총 397만5000원을 소진함으로써 대출 자금이 바닥나자 경신은 다시 자금난에 빠져들었다.
설상가상으로 경취주 거래를 둘러싼 분규가 재발, 중매인들이 재차 영업정지 처분을 받고 경취주의 단기거래가 정지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놀란 경취는 수수료율을 변경하는 한편 1922년 7월 4일 임시주총을 열어 증시부양책에 대해 부랴부랴 논의했다.
한국인 중역 조선일보 설립자인 조진태등만 남아
조선일보 설립자 조진태 취체역으로 경취주 파동 다음해 물러났다.2002년 3월의 1차 친일파 명단에 포함된 인물이다. | ||
그리고 다음날인 5일에는 중역의 해임과 개선도 단행했다.
이에 따라 창립당시 26명의 발기인중 3명뿐이었던 한국인 중역이 2명으로 더욱 줄었으며 1924년엔 조진태(趙鎭泰) 취체역(이사를 일본에선 이렇게 부른다)마저 물러나면서 한국인 중역은 이병학(李柄學)만 남게 된다.
조진태는 조선일보 설립자이며 일본천황 대정의 친목회 회원이기도 했다. 조진태는 2002년 3월의 1차 친일파 명단에 포함됐다.
이병학은 1921~1925년 중추원에서 근무했던 친일파로 2002년 2월28일 3.1절을 앞두고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자체 조사를 통해 발표한 ‘일제하 친일 반민족행위자 1차 명단’에 들었던 인물들이다.
아무튼 경취주는 지속적인 약세속에 이듬해인 1923년 관동대지진까지 겹치면서 바닥없이 추락하고 만다.
다음주에는 경취 발기인이었던 조진태 등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고 일본 관동대지진 경과 및 참상을 중심으로 조선증시에 미친 영향을 상술할 계획이다.
*자료 제공 및 도움말 주신 분 = 증권연구가 위문복 (www.aha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