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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폴 "이구 황태손 사건, 사실상 졸속 처리"

[단독 발굴] 대한제국 '이구 황태손' 의문사 5년 - 上

이종엽 기자 | lee@newsprime.co.kr | 2010.07.16 09:12:45

[프라임경제] “제가 최근에 접한 인터폴 관련 서류 중 이렇게 단순하고 이상한 서류들로 구성된 것은 처음 봅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떠나 재외국민 사망 처리과정에서 의문점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2005년 12월, 서울지방경찰청 보안부 외사과 관계자.

   
<사진제공= 대한황실재건회>
지난 2005년 7월 18일 오후 5시 6분. 대한제국 광무황제의 손자이자 영친왕의 유일 혈손인 황태손 이구가 사망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이후 언론에서는 정확한 사망 시각은 알 수 없지만 대략 7월 16일 경으로 추정, 일본 도쿄에 위치한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이구 황태손 유해의 국내 이송과 공식절차를 통한 장례가 진행되면서 대한제국의 역사적 인물은 그렇게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서거 4년이 지난 2009년에 이미 역사 속 인물이 돼 버린 이구 황태손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지난 해 11월 20일 오후 14시 30분 서울지방법원 민사 569호 법정에서는 이구 황태손의 양자 계승 적법성과 정부 지원금 문제가 거론되면서 정통성에 대한 부분이 논의 됐고 이러한 법적 과정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미궁의 죽음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환기되고 있다.

특히, 올해 2010년은 경술국치 100년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으며, 현 정부에서는 일왕의 국내 방한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져 미해결 역사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

국내 최초로 공개하는 이구 황태손의 사망 관련 인터폴(Interpol) 보고서와 사망 현장인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현장에 대한 검증과 현재 법정에서 논란이 있는 이구 황태손 사후 양자 입적 문제는 한 인물의 사망이 역사의 종지부가 아니라 새로운 논란과 역사 인식 충돌이라는 점에서 향후 과제로 다가올 것이다.

◆ 이구 황태손은 누구?

이구 황태손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1897∼1970)의 외아들로 어머니는 일본 황족 출신으로 1901년 11월 4일 메이지 일왕의 조카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의 딸로 태어난 마사코(方子)다. 이방자의 어머니는 화족(華族·작위를 받은 귀족) 출신의 나베시마 이츠코로 일본 내 최상층 신분의 집안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방자는 한때 훗날 아시아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은 히로히토의 황태자비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일본에 볼모로 있던 영친왕 이은의 약혼녀로 1916년 지명되면서 일제의 혼혈정책 수단으로 활용됐고 해방 이후에도 그녀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하고 을사조약을 맺은 후 영친왕을 태자에 책봉했는데 그때 영친왕의 나이는 열한 살로 이후 일본 강제 유학을 보내 이방자 여사와 정략결혼 생활에서 2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장남 이진은 돌연사로 일찍 세상을 떴으며,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이 점차 가시화되는 1931년 12월 29일 이구 황태손은 일본 도쿄 현재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자리에서 태어나게 된다.

이구 황태손은 이후 고교 재학 중인 14세 때 광복을 맞아 일본 주둔 맥아더 사령부의 주선으로 미국행에 올랐고 MIT공대를 건축학과를 졸업해 전도유망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좌측 부터 줄리아 뮬럭 여사, 의친왕 2녀 이해원 황손, 본지 기자.>
이후 1958년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회사 동료인 줄리아 뮬럭(Julia Mullock)과 결혼한다. 이후 1963년 6월 한국으로 건너와 본격적인 황실 구성원으로 제례를 비롯한 종친으로서의 역할과 건축 관련 사업과 대학 강의 등을 하면서 살았지만 이구 황태손과 줄리아 여사 사이에 자식이 없고 연이은 사업 실패 등으로 인해 1979년에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후 여러 갈등 요인으로 인해 이들 부부는 이혼을 맞이하게 되고, 이구 황태손은 일본, 줄리아 여사는 미국 하와이에 살면서 사실상 한국과 멀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들 둘 사이에는 줄리아 여사가 사회봉사활동을 하던 시절 인연을 맺은 한국 여성을 양녀로 맞이하게 돼 혈연적으로 관련이 없지만 법적인 부분에서 자녀가 존재한다.

이후 이구 황태손은 일본 신도의 한 교파인 대화지궁(大和之宮)의 핵심 인물인 아리타 기누코(有田絹子)를 만나면서 사실상 한국과의 인연은 끊게 된다.

그러던 중인 1996년 2월, 이구 황태손은 건강 등의 이유로 한국으로 영구귀국을 결정,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의 총재로 추대되면서 종묘대제를 비롯한 각종 제례의 초헌관으로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또다시 일본과 한국을 오가면서 종묘대제인 매년 5월 경에 국내에 일시 귀국을 하게 되면서 종약원과 갈등만 키우는 결정적 원인이 됐다.

그리고 사망 직전 해인 2004년 2월, 75세라는 적지 않은 몸을 이끌고 이구 황태손은 다시 한국을 방문하게 되는데, 여느 때와 달리 후계 문제로 3년만의 귀국해 관심을 모은바 있다.

이때 종약원은 여러 대안 중 양자 입적을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는데 일본 혼혈인 영친왕계에 대한 반발과 함께 양자 입적이 내부 분란 불씨가 될 수 있다는 등의 각종 의견으로 인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되고 이러한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에 이구 황태손이 사망하게 된다.

결코 가볍지 않은 역사적 굴레 속에서 대한제국 황태손은 그렇게 우리 기억 속에서 사려져 갔다.

◆ 검시의 소견 빠진 비정상적 보고서

이번 인터폴 보고서는 이구 황태손 사망사고 당시 사건에 대한 일본 경시청 및 관계자의 검안서와 경시청 공식 보고서 그리고 사망 직전까지 전화통화 기록으로 작성돼 한국 경찰청으로 이관된 서류로 2005년 7월 사망 직후인 10월 경 시점 본지가 최초로 입수한 문건이다.

결론 부터 말하자면, 이번 인터폴 보고서는 의문스러운 점이 곳곳에서 발견된다.(일본 死體取扱規則 제 4조에 의거 작성된 문서)

   
<사진= 최종 검시 보고서에는 입회 의사가 없었던 것을 비롯해 많은 여러 의혹을 가질 수 있는 정황들이 나오고 있다>
첫째, 사인과 관련해 자살과 타살, 자연사라는 일반적 구분에 있어 그 어느 사인도 아닌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일관된다는 점과 검시 의사의 소견과 확인 도장이 없다는 점이다.

둘째, 이구 황태손의 후견인을 넘어 외가라는 특수 관계인으로 분류돼 사고 후 시신·소지품의 인도까지 밀접하게 관련된 나시모토 다카오(梨本隆夫)가 사고 직전 일 오후까지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고서에는 어떠한 참고인 조사 및 진술이 진행되지 않았다.

셋째, 사망의 직접적사인을 허혈성심부전으로 추정된다고 적시했지만 이구 황태손의 병력과 기존 건강상태에 대한 조사가 없었으며, 넷째, 일본 내 황태손의 유서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보고서에는 나왔지만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는 사고 직후 장례식 도중 양자입적을 위한 소위 약정서를 근거로 이미 1990년 1월 13일 민법 개정에서 폐지된 사후 양자제도를 통해 종통(宗統)을 잇는다고 밝힌 점은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보고서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부분은 바로 구 왕족 집안인 나시모토(梨本)궁과 현 일본 왕실과의 관계를 상당히 세세하게 지적하면서 일본 내 언론 특징 중 하나인 ‘왕실 취재 불가침’과 유사한 뉘앙스가 경시청 보고서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이다.

<다음에 계속>

본 기사의 일본 현지 취재는 한국언론재단 산하 언론교육원 주관 2009년 언론인 디플로마 과정(9월 28일~11월 16일)의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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